앞서 학생 협주곡을 작곡한 자이츠의 경우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자 연주자, 선생님이었습니다. 반면 비발디는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피에타 고아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됩니다. 피에타 고아원은 고아원이라기보다는 규모를 갖춘 음악학교였고, 학생들의 실력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비발디는 뛰어난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바이올린 곡을 많이 작곡했고,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 인기도 영향력도 매우 높았습니다.
이 곡은 바이올린을 2년 이상 배우고 중급으로 넘어가는 학생들에게 관문과도 같은 곡입니다. 자이츠 협주곡보다 조금 더 길고, 후반부는 기술적으로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오케스트라 오디션 때도 비발디 협주곡 가단조의 1악장이 많이 선곡되곤 합니다. 3악장의 경우 Presto라고 해서 매우 빠른 박자로 연주하는 곡인데, 난이도가 꽤 높아서 스즈키 5권 이상 진도를 나간 학생들도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이 곡을 처음 배울 때에는 악보대로 실수 없이 연주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6분 음표의 빠른 전개가 많은데, 자칫하면 손가락이 꼬여 중단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악기를 하지 않다가 이 곡을 다시 배우게 되었을 때, 새로운 선생님은 저에게 ‘같은 음이 반복되는 곳을 같지 않게 연주하도록’ 주문했습니다. 이 곡은 주로 같은 음, 같은 박자,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도입부에는 같은 음이 4번 나오는 마디가 반복됩니다.
“전공자들은 웬만해서는 같은 음이 연속으로 나올 때, 똑같은 톤으로 내지 않아요. 그것이 듣고 싶어지는 음악을 만드는 비결입니다.”
앞서 비브라토의 경우 일정한 폭과 일정한 속도로 반복하는 것이 포인트였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비브라토 역시 강약 변화, 속도 변화등의 조절이 들어갑니다. 여기에 활 쓰기 역시 점점 크게(crescendo) 또는 점점 작게(decrescendo)를 표현하기 위해 활을 긋는 길이와 압력을 조절합니다. 비발디 협주곡 가단조 1악장의 경우 같은 음 4개는 ‘점점 크게’로 처리합니다. 3악장에는 6마디로 이루어진 한 phrase가 처음에는 강하게(forte)로, 두 번째에는 여리게(piano)로 수없이 반복됩니다. 아마추어 연습생의 경우 이 강약을 지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일단 악보를 읽기 바쁘고, 여리게 하는 부분에서 얼마나 여리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려운 부분일수록 여리게 표현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힘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소리는 비교적 꽉 차게 나야 하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잘 감이 오지 않습니다.
만약 음악이 단순히 규칙적으로 음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면 앞으로는 AI가 작곡해도 사람이 작곡한 것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음악을 깊이 있게 듣고 스스로 연주해 본다면,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정서가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슬픔은 슬프기만 하지 않고, 반복되는 음이라도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음악에는 강약이 있고, 긴장과 완화가 있으며 때로는 장조와 단조를 오가며 변화를 추구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한다는 것은 예술 중에서도 비교적 규칙 안에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꾸준히 연습하는 성실함이 기본이고, 테크닉이 받쳐 주어야 표현력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칙적인 음악에 변화를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비발디는 절도 있고 규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 곡을 활을 절도 있게 끊고 비브라토를 적게 넣어 절제된 스타일로 연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규칙 안에서도 변화를 주어 낭만시대의 곡처럼 연주할 수도 있습니다. 스즈키 교본 4권의 맨 뒷 페이지를 보면, Tivadar Nachez라는 낭만시대 헝가리 음악가에 의해 편곡된 악보를 스즈키 교본에 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방법을 더 선호하는데, 규칙적인 곡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이츠의 협주곡은 장조로 시작해도 중간에 단조의 멜로디가 나오고, 비발디의 협주곡은 단조로 시작해도 중간에 차분하고 덜 슬픈 멜로디가 나옵니다. 규칙적인 패턴이 반복되다가, 중간에 조가 바뀌고 패턴이 바뀌는 곳에서 우리는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파도를 타듯 곡은 흘러갑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는 슬프기만 한 삶도, 기쁘기만 한 삶도 없습니다. 저 역시 제 삶이 터널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상실을 겪었고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홀로 멈추어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땐 비발디의 협주곡 가단조를 연주하며, 단조롭고 슬프게 느껴지는 멜로디 속에 인생의 변화무쌍한 굴곡과 카타르시스를 느껴봅니다.
비발디는 미숙아로 태어나 천식을 앓았고, 아버지는 비발디의 음악적 재능을 알았음에도 경제적 이유로 수도원에서 신부의 길을 걷게 합니다. 다행히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피에타 음악학교의 유능한 지도자이자 작곡가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들도 많았습니다. 말년에는 전 재산을 걸었던 오페라 공연이 성사되지 못하고, 후원자도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젊은 시절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몰락하게 됩니다. 비발디 역시 인생의 굴곡을 끝없이 견뎌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깊은 슬픔 속에 있어 힘든 분이 계시다면, 비발디의 음악이 그렇듯 이 슬픔도 언젠가는 지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