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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Jan 01. 2024

F. Seitz 협주곡, 스즈키 4권의 시작

연주는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

 Fredrich Seitz(1848-1918, 이하 자이츠로 표시)는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고, 수많은 학생을 가르친 선생님이었습니다. 연주도, 가르치는 것도 잘하는데, 작곡까지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이츠는 실내악 곡과 5개의 학생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특히 그중 2번과 5번이 스즈키 4권에 실려 있기에 더욱 유명합니다.

    

 보통 협주곡이라고 하면 실력 있는 독주자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대곡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자이츠의 협주곡은 학생용이기에 비교적 짧고, 겹줄 긋기나 스타카토, 슬러(두 음을 하나의 활로 이어서 연주) 등 꼭 배워야 할 테크닉을 넣은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차이코프스키나 멘델스존 협주곡처럼 화려한 대곡은 아니지만, 짧은 곡 안에 갖추어야 할 구조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 바로크 시대에는 비발디나 텔레만 등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현악기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오케스트라와도 연주가 가능했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 고전시대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작곡한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낭만주의 시대에는 독주자는 기교를 한껏 뽐내고, 듣는 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걸작과 같은 바이올린 협주곡이 나왔습니다.  

 

 협주곡의 1악장과 3악장은 대개 빠르고 2악장은 느리면서 서정적입니다. 1악장은 독주자의 테크닉을 충분히 보여주는 어렵고도 긴 곡이 많습니다. 2악장에서 한숨 돌리면서 듣는 이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하다가 3악장에서는 경쾌하고 빠른 박자로 협주곡을 마무리합니다. 모든 과정은 오케스트라와 독주자의 대화와도 같이 주고받는 형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협주곡에는 카덴차라고 불리는 독주 부분이 있는데 한동안 오케스트라 없이 독주자만 연주하는 구간입니다. 여기에서 독주자는 자신의 기술을 최대치로 뽐내며 감정을 서슴없이 표현합니다. 카덴차는 원래 작곡가의 버전 외에도 후대의 작곡가나 연주가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스즈키 4권에 실린 자이츠 협주곡 중 5번 1악장을 보면, 가장 중요한 주제가 처음에 나옵니다. 이 주제는 시간을 두고 반복되는데, 기-승-전의 구조가 첫 페이지에서 완성되지만 바로 결말이 나오지 않고 화려한 기교의 프레이즈를 넣어 결말을 늦춥니다. 마치 가수가 후렴부에서 자신의 최대치의 고음을 뽑아내며 듣는 이를 숨죽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1. 좌, 파란 괄호안의 구간이 주제 선율이고 도입부에는 risoluto, '자신감 있게'라고 쓰여 있다. 2. 우, 후반부 빨간 괄호구간은 음표가 많고 어려운 테크닉이 많다



 저는 2년 전 이 곡을 연습해서 학원에서 이 곡을 발표했습니다. 연습하는 동안 특히 후반부가 어려웠는데, 여러 줄을 넘나들며 스타카토와 슬러를 반복하는 빠른 부분이 특히 어려웠습니다. 잘 안 되는 부분 때문에 힘들어하는 저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멜로디는 어디일까요?”


 중요하다는 의미는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주 선율입니다. 모든 노래에는 주 선율이 있습니다. 이 곡에서는 도입부부터 힘차면서도 아름다운 장조의 멜로디가 반복됩니다. 중간에 서정적인 분위기로 잠시 듣는 이를 이완시켰다가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이어 후반부에는 주 선율과 비슷한 코드 진행으로 빠르고 어려운 구간이 다시 한번 나오는데, 주 선율이라기보다는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아마추어 연습생의 입장에서는 이 곡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인 후반부를 마스터하는 것이 목표가 되기 쉽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저의 마음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듣는 이를 설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연주해 봤는데 이 곡은 이런 곡이에요.’라고 이야기하는 거지요. 거기에 반드시 테크닉이 우선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비록 어려운 부분을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주 선율을 최대한 드러나게 표현해야 해요. 자신감을 가지고 전체적인 곡의 흐름을 먼저 완성해 보세요. ‘나는 아직 이 정도의 기술 밖에 안 되니까 강약이나 부드러움, 곡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듣는 이가 연주에 몰입할 수 없거든요.”     


저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잘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듣는 이가 오디션 심사위원이나 입시 감독관이라면 얼마나 잘했는지 테크닉에 대한 평가를 하겠지만, 저의 연주를 듣는 이는 심사위원이나 감독관이 아니니까요. 저도 개인 발표회 때 다른 분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어떤 분위기와 멜로디의 곡을 연주하는지를 주의 깊게 봅니다. 그리고 얼마나 잘하시는지를 떠나서 각자의 장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됩니다.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즐기는 자리가 되지요. 어떤 분은 힘차게 활 쓰기를 잘하고, 어떤 분은 왼손 운지가 정확해서 음정이 딱 맞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고, 또 제가 모르는 곡을 연주했을 땐 새롭게 느껴지면서 찾아보게 되지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서 경주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연극을 하며, 어느 순간 꼭 필요할 때만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경주와 경쟁이 필요한 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순간은 입시나 취업처럼 분명한 목표가 있어 내가 선택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경쟁을 통해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무 떨리고 힘들어집니다. 실수할까 봐,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까 봐 조바심 내며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잘 해내기 위해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을 놓치기도 합니다.      


자이츠는 이 곡을 작곡하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학생을 위한 협주곡이니 연주회장에서 대가들에 의해 오래오래 연주되기를 기대하지는 못해도 낭만주의 시대의 아름다움, 간결하면서도 꼭 필요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통해 협주곡의 묘미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 곡의 곳곳에는 어떻게 표현하라는 작곡가의 당부가 음악 용어로 쓰여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연주하는 곡으로 상대를 설득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해낼 수 있는 박자 내에서 최대한 곡의 느낌을 살리도록 힘차게, 경쾌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연주할 부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발표라기보다는 소개와 설득이라는 생각으로 연주를 했습니다. 발표회를 마치고 난 뒤 영상을 보니,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표현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저의 강약 표현이 너무 흐릿했습니다. 마치 평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얼굴 화장을 하는 것과, 무대에 올라오는 배우들의 얼굴 화장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무대에서는 조금 더 진하고 과장되게 표현해야 듣는 이에게 잘 전달되는 것이지요. 실수없이 어려운 구간을 잘 해내도 강약이 표현되지 않으면 곡이 밋밋하고 지루해서 인상에 남지 않습니다.      


 연주는 상대방에게 이 곡을 내 나름대로 소화해서 표현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글을 쓰고 표현하는 과정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표현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더 즐겁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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