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옷을 입은 소녀들이 유령 같은 모습으로 선생님처럼 보이는 여인 주위에 모여 있습니다. 폭 1m, 길이가 2m에 이르는 이 그림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미술가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1953-)의 <제복을 입은 천사들>이라는 작품입니다.
마를렌 뒤마, Angels in Uniform, 2012, 200 x 100 cm
2012년 밀라노의 팔라조 델 스텔린<Palazzo delle Stelline>에서 열린 전시회에 뒤마는 건물의 역사와 관련된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팔라조 델 스텔린은 원래 수녀원이었다가 병원으로, 다시 고아원으로 바뀐 곳으로, 현재는 연극 예술학교, 각종 국제 위원회 및 연구소 본부, 박물관과 호텔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뒤마는 초상화를 주로 그리는 화가입니다. 고전적인 화가들이 그랬듯이 모델을 세워놓고 그리는 초상화가 아니라, 사진에 드러난 인물을 그립니다. 이 그림 역시 학교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사진을 재해석하여 그린 것입니다. 소녀들은 유령처럼 이목구비가 흐릿하면서 기괴하고, 어둡습니다. 소녀들의 표정은 음울해 보이며,엄청난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뒤마는 초상화를 그리지만, 인물들은 아름답거나 사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윤곽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그리지 않고 흐릿하게 번지듯 그립니다. 초상화의 인물들은 일그러지고, 변형되어 흐릿합니다. 배경은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며 어떤 공간인지 알 수 없어 추상적이기도 합니다.
뒤마의 그림을 보며 떠올린 책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을 배경으로 한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입니다.
아일랜드에는 1920년대부터 막달레나 수녀원이라는 가톨릭 수녀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미혼모들을 돌보고 종교적으로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세탁소를 운영했습니다. 정부기관이나 숙박업소, 군대의 세탁물을 위탁받았습니다. 가난했던 아일랜드 정부를 대신하여 종교단체가 정부의 협조하에 사회복지를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원은 매춘부나 미혼모 외에도 성폭행 피해자나 고아들까지 수용했고, 소녀들에게 무보수로 강제 노동을 시키며 신체적 폭력과 성추행까지 일삼는 등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게다가 미혼모가 낳은 아이는 엄마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양을 보내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습니다. 수녀원은 1996년에야 문을 닫았고 배후에 정부의 협조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다가 2013년에야 총리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막달레나 수녀원은 미국, 영국 등에도 있었지만 유독 아일랜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오랜 세월 지속된 가난과 정부의 무능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은 펄롱이라는 39세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펄롱은 미혼모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윌슨 부인의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였습니다. 펄롱의 어머니는 윌슨 부인의 집에서 일하던 중 임신을 했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윌슨 부인은 그녀를 내쫓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지금도 싱글맘이 아이를 낳아 키우려면 각종 지원이 필요하고 사회적 시선을 견뎌내는 것이 힘든데, 1950년대 가난했던 아일랜드에서는 어땠을까요? 막달레나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펄롱이 열두 살 때 죽었지만, 윌슨 부인은 펄롱을 계속 돌봐 주었고 펄롱은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석탄과 목재상으로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독립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1985년, 아일랜드는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해고와 폐업이 줄을 이었습니다. 어려운 현실에도 펄롱은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나가며 어떻게든 아이들을 잘 키워 지역 유일의 명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졸업시키고자 합니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수녀원에 수용된 헐벗은 소녀들을 봅니다. 특히 밤새 창고에 갇힌 소녀를 발견했을 때, 그는 석 달 전 아이를 낳았고 그들이 데려갔다는 소녀의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이 바로 미혼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펄롱은 수많은 고민 끝에 소녀를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합니다. 이웃들조차 "여태 열심히 살아온 것을 생각해서 막강한 권력의 수녀원과 충돌하지 말라"라고 얘기하지만, 펄롱은 윌슨 부인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사소한 것들을 생각하며 앞으로 있을 어려움을 감수하고 소녀를 데리고 나옵니다.
클레어 키건은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고, 아일랜드 정부와 수녀원의 치부를 드러냈습니다. 뒤마 역시 오래전 수녀원에서 병원으로, 또 고아원으로 운영되었던 건물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사진을 보고 소녀들의 어두운 단체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막달레나 수녀원처럼 노동착취나 인권유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화가가 사진을 통해 본 소녀들은 행복한 모습은 아닙니다.
지금은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사건을 고발할 수 있고, 언론에 제보도 할 수 있지만 막달레나 수녀원에 수용되었던 소녀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소설가와 화가는 기자가 아니기에 사실만을 정확하게 보도할 수도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세상에 소녀들의 이야기를 알립니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펄롱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수하면서 옳다고 믿는 일을 한 것처럼, 예술가 역시 사람들이 들추기 싫어하는 민감한 주제를 작품으로 세상에 꺼내는 것입니다.
뒤마의 그림을 다시 보면 슬프다기보다는 무섭습니다. 소녀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고, 눈빛은 유령 같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주된 정서는 우울과 공포였는지도 모릅니다.
뒤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심각한 인종차별정책과 예술가에 대한 검열을 견디지 못하고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인종, 여성, 아이들을 주로 다룹니다. 죽음을 앞둔 죄수, 이미 죽은 인물 등 주로 죽음과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수채화 물감이 번지듯 눈코입을 그리며, 고통과 우울로 일그러진 기괴한 표정을 관찰할 수 있어 마치 뭉크의 <절규>를 보는 듯합니다.
소설 속 펄롱의 부인은 현실 적응력이 뛰어난 성격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펄롱이 수녀원 소녀들에게 관심갖는 것을 꺼려합니다. 펄롱에게는 '윌슨 부인은 부유하고 자기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었기에 그저 친절을 베풀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윌슨 부인보다 더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약자에게 무조건 손을 내밀지는 않습니다. 막강한 수녀원 조직에도 윌슨 부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수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소녀들을 착취하고 아기를 빼앗아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으니까요.
펄롱은 딸들을 수녀원 소속의 명문학교에 보내지 못하거나 수녀원에 더 이상 석탄을 납품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녀를 수녀원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윌슨 부인처럼 여유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펄롱은 자신이 받은 친절과 사랑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마를렌 뒤마와 클레어 키건 역시 불편한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받게 될 비난과 손실을 무릅쓰고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이 추운 겨울날 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자유와 평등, 인권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그 혜택을 받고 자라난 저 역시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돕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음 주에는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개봉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관람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