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가 우리를 치유하는 드라마가 된 그 이유에 관하여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1.
3년 전 이맘때였다.
내가 당시에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에 누군가의 댓글이 달렸는데,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당시 내가 올려놓았던 그 영상이 마음에 들어 메시지를 남긴 그 사람은 태국인이었고, 그는 어쩐 일이었는지 나를 급하게 만나고 싶어 했다. 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만든 영상이 태국어로 만들어진 영상이었으니까 태국인이 뭔가 댓글을 단다는 게 뭐가 놀라울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들,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의외로 일은 쉽게 풀려 나갔다. 그는 마침 서울 여행 중이었고, 그래서일까 이 ‘번개’는 극적으로 성사되어 며칠 후 홍대 앞 7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기에 이르렀다.
찌는듯한 더위, 늘 그렇듯 젊음이 넘치는 홍대 거리의 한 편에서 나는 그 태국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보다 한 뼘 이상은 큰 키에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내가 방콕에 있을 때 많이 봐왔던, 맞다. 그녀는 소위 ‘레이디 보이(Lady boy)’였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만면에 활짝 웃음을 보인 그녀와 함께 8번 출구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2.
해가 거의 지기까지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집안의 화장품 사업을 도와주고 있고, 한국에 자주 온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내가 태국어 영상을 만들게 된 이유. 또 태국의 미디어 환경 등. 영상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더군다나 당시 해외로 내 커리어를 넓히고 싶었던 내게 그녀는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그가 나를 만나자고 한 본론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사실 만남이 거의 끝날 무렵에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꺼내놓았다. 그건 한국인 남자와의 로맨스에 관한 것으로 이 이야기를 숏 필름, 즉 단편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할 테니 내가 이 이야기를 숏 필름으로 제작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이 제안을 거부할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이야기도 준비되어 있고 무엇보다 제작비를 지원하겠다니 이보다 좋은 제안이 어디 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을까 사실 잘 믿기지 않기도 했지만 아무튼 우리는 서로 카카오톡 아이디를 교환하고 일단 헤어졌다.
3.
며칠간 그녀와 이런저런 숏 필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문제는 그날 오후에 발생했다. 뭔가 생각난 게 있어 그녀에게 물어보려고 카카오톡을 켰는데, 왠지 그 카카오톡 채팅방이 평소와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프로필은 비워져 있고, 대화창은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녀가 카카오톡을 탈퇴해 버린 거다.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이내 정신이 또렷해지고 한쪽에서 알 수 없는, 아니 알 수 있는 짜증이 밀려왔다. 뭔가 며칠 간 이 이방인 여성에게 놀림을 당한듯한 내 모습이 휴대폰 액정 너머로 보였다. 힘이 빠졌지만 어쩌겠나. 뭔가 금전적인 피해가 간 것은 아니기에 이 이야기는 곧 친구들과 만나거나 할 때 주고받을 가십거리가 되어서 잘근잘근 씹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날도 어느 모임에 나와 사람들 앞에서 대차게 그녀와 그 이야기를 씹으려고 하는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뭔가 어떤 운명의 목소리가 종소리와 같이 내게 내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는 너에게 이야기를 주고 사라진 거야 펑하고’
이 음성은 내가 이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다. 그녀는 떠났다. 그런데, 이야기는 남았다. 이건 마치 그녀가 나에게 찾아와 이 이야기를 맡겨두곤 다시 저 멀리 미지의 세계로 사라진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운명과도 같이 나는 이 이야기를 숏 필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태국인 여성의 이야기가 아닌, 나만의 이야기로 각색된 숏 필름의 시나리오 초안이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방콕에 사는 여성 A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텍스트로 만난 한국인 남성 B와 얽히고설킨 그 관계들을 풀어가는 이야기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 태국인 주인공 A의 마음이 움직이고 결심하는 그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나가고 싶었다.
4.
그런 와중에 나는 <나의 아저씨>라는 이 드라마를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라며 열광하는 이유도 궁금했고, 이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위로받고 치유된다는 ‘기현상’의 근원도 알고 싶어 졌다.
생각보다 우울한 시작과 꾸역꾸역 두 불행한 인생의 이야기가 고구마처럼 펼쳐지더니 끝내 ‘우리 행복하자’를 주문처럼 외우던 그들에게 평안이 찾아왔고 그렇게 영상은 끝이 났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다 보니, 더군다나 직전까지 운명처럼 다가온 숏 필름의 시나리오까지 완성해 놓은 사람이니 이 드라마에 대한 ‘소감 평’이 조금 남다를 수 있을듯하여 사족과 함께 글을 끄적여 본다. 이 드라마는 내가 고민하고 있던 아니 내가 놓치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던 많은 것들을 해결해 주는, 사실 내 머리가 맑아지게 하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드라마들이 많던가. 물론 모든 것들이 말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 되게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되는 드라마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다. 한 가지 제작 실습을 해보자.
‘피곤한 퇴근길’이라는 주제가 있다고 해보자. 이걸 영상으로 만들어 보라는 숙제를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곳에 많은 정보를 담으려고 애쓴다. 자막도 깐다.
‘밤 열한 시 피곤한 퇴근길.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걷는다.’
이 피곤한 퇴근길을 표현할 만한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그냥 어두컴컴한 버스 정류장과 그 옆으로 길게 뻗은 작은 길이 다 보일 만큼 화면을 넓게 빼고, 주인공이 그 길을 느릿느릿 타박타박 걷게 하면 된다.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주인공은 1105호 자신의 집에 다다르기까지 그 기다란 복도를 걷게 하면 된다. 연민을 배경음악 삼아 덧칠할 필요도,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중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유난히 허전한 그 밤의 밤공기, 그의 힘 잃은 구두 소리, 나지막한 숨소리가 이 모든 것들을 그 어떤 것보다 역동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창작물에서 어떤 표현을 ‘설명과 분석’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보는 이들이 그것을 자신의 경험을 버무려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힘들었던 그날 밤의 공기도 저랬지.
저 발걸음이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아.
내가 걷던 표정과 닮았네. 저 사람도 내가 했던 그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5.
<나의 아저씨>가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레퍼런스로 줄 수 있는 미덕은 세상의 많은 창작물들이 실패하는 이유를 반증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실패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드라마라는 것이다. 다른 드라마들, 다른 이야기들은 왜 실패하는 걸까. 나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고 싶다. 첫째는, 시청자들과 호흡을 같이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상이라는 게 제작자와 시청자가 같이 손을 잡고 달려가는 마라톤이라고 했을 때, 호흡을 같이하지 못하는 영상은 시청자를 내팽개치고 혼자 저만치 달려가거나, 시청자는 이미 저만큼 달려갔는데 혼자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다. 앞의 경우에는 시청자들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주인공이 울음을 터뜨리거나 감동에 빠져 버린 경우, 뒤의 경우는 이미 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다 파악이 되어 지루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뭐가 됐든 둘 다 최악이다.
<나의 아저씨>는 이 두 가지, 최악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제작자들에게 교훈을, 그리고 이런 최악의 이야기를 경험해왔던 시청자들에게는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한다. 어떻게 <나의 아저씨>는 그 긴 마라톤의 순간순간 시청자들의 손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 시청자들과 함께 골인 지점에서 멋진 피니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 나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나의 아저씨>는 사람을 넘어 인생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아저씨>는 스토리 안의 인물들은 탄생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인생 전체를 조망한 듯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티브이 속 드라마는 사람의 인생으로 따지면 짧게는 단 며칠에서 길게는 몇 년의 시간에 걸친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그 순간에 주어진 상황과 캐릭터가 스토리를 끌고 간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를 볼 때면 조금 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서 그림을 끄적여 봤는데, 아래 그림을 한 번 보자.
두 남녀의 인생을 저렇게 라인으로 표현한다고 한다면, 저 굽은 라인 A의 방향과 모양은 인생에서 맞닥트리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들이다. 저 두 사람은 저렇게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회색 음영의 사각형이 바로 드라마가 비추는 순간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저 두 사람은 저 회색 영역에서 보이는 인생의 라인들만큼만 시청자들에게 보이게 된다.
이 그림을 만들면서 내가 생각하는 인생에 대해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이내 그 자리로 되돌아간다. 현실세계에선 사람들에게 대오각성, 쇄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간혹 변화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어렵냐 하면 내가 인생 전체를 살아왔던 그 시간 (그 시간 안에는 나를 형성한 습관, 상처, 행복, 관계들이 얽혀 있음)을 거스를 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30년, 40년을 꽁꽁 묶어가며 만들어왔던 나 자신의 존재를 뒤바꿀 만큼의 힘은 우리에게 결코 주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나 자신의 좋은 점들을 발견하며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순간처럼 짧디 짧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믿는다. 이 심플하면서 경건한 인생의 무거운 굴레를 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섣불리 변화된 인생, 결심으로 완전히 뒤바뀐 삶을 한가롭게 노래한다는 것은 ‘기만’이다.
7.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라. 그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과 애정이 결핍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 속의 인간들은 갑자기 변하고, 갑자기 예측 불가한 행동을 하고, 심지어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 모두는 그냥 우리일 뿐이니 말이다.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면 그 순간부터 그 조건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 이 세상 누구에게 그런 심판의 권한이 주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소위 ‘3류 드라마들’은 누군가의 삶을 매도하고 누군가의 삶이 좋은 것이라고 결정해 버린다. 끝없이 열등해 보이는 인생을 계도하고 징벌하고, 우등하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숭배되고 포장된다. 그림에서 B의 궤적이 이런 삼류 드라마들이 그려내는 인생의 모습이다. 저런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드라마를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면면으로 자극은 줄 수 있을지언정 우리에게 깊은 울림은 줄 수 없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희망사항만 가득한 좀비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드라마가 조망해주는 회색 음영의 공간에서 남자가 저런 선택의 궤적을 보이고, 여자가 저런 궤적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드라마가 비추기 전, 그들의 탄생부터 시작된 인생의 긴 여정의 곡선이 저런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냥 저 사람들의 인생이 저런 거다. 그러니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저들은 저 곡선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 안에서 그들의 선택은 모두 예측 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아저씨>가 가져다주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감의 본질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출연진들은 모두 이 예측 가능한 선택들을 드라마에서 하고 있었고, 그것이 옳건 그르건 관계없이 그들의 선택에 공감하며 드라마 속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덩달아 치유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사람을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안정감을 시청자들이 갖게 되었다.
그러니 박동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이지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누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도 이해가 되고,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가 내 상처가 된다. 세상의 많은 드라마 중 이렇게 내가 누군가를 안다는 느낌을 주는 드라마는 결코 많지 않았다.
<나의 아저씨> 속 박동훈은 그냥 완벽한 사람이다. 그는 회사에서 후임들을 잘 돌보고, 상사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이며, 아내에게 따뜻하며 가족들을 사랑한다. 주변인에게는 무한한 배려심을 보인다. 그렇다고 물러 터진 사람도 아니다. 모욕을 당한 형을 위해 복수를 하기 위해 망치를 들고 뛰어들 만큼 용감하고 의롭다. 그는 <나의 아저씨>에서 끝까지 그의 인생을 산다. 사람들이 배신하고, 꿀밤 때리고 도망가도 묵묵히 그걸 맞고 견딘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때문에 대들다 또 맞는다. 그 박동훈의 답답함이 우연찮게 누군가의 인생을 쉬게 해주는 큰 나무 그늘이 되어준 순간, 시청자들 모두가 이지안이 되어 그 나무 그늘 속에서 쉼을 얻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가 나무 그늘이 되어주려고 노력했던 것도 아니다. 환심을 사려했던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나무 그늘인 줄 몰랐지만 이지안에게는 그게 세상에서 맛볼 수 없었던 가장 시원한 나무 그늘이었다.
이지안도 마찬가지이다. 돈이 필요했던 그가 박동훈이 뇌물로 받은 돈을 훔치고 그걸 되돌려주는 과정에서 엄청난 개과천선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쫓기고 힘들고, 방황한다. 그가 박동훈에게 항복한 것은 박동훈이 너무나 좋은 사람이기에 이지안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정해서 조건을 맞춘 게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박동훈을 만남으로써 그는 그냥 용납되었을 뿐이다.
<나의 아저씨>가 한 일은 박동훈의 인생, 이지안의 인생, 아니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인물 전체를 하나하나의 인생으로 존중해주고, 그들의 연약함, 나약함 들을 그들의 것으로 인정했던 것. 그리고 그들 안에 잠자고 있던 선하고 아름다운 에너지들이 서로의 행복을 위해 발버둥 치도록 했던 것이다. 박동훈은 박동훈의 인생을 살게 하고, 이지안은 이지안의 인생을 살게 함으로써 그들이 서로 만나 어떻게 서로의 인생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인생을 통찰한 제작진이 불어넣은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8.
<나의 아저씨>를 보고 나 스스로 얼마나 타성에 젖은 글쓰기를 하고 있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썼던 그 시나리오들을 다시 수정하고 싶었다.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주인공 A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었다. 더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시나리오 안에서 그녀의 선택이 어떤 한 실존하는 인격이 만들어내는 것들이어서 보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다시 만들어보고 싶었다. <나의 아저씨>는 내게서 끝났지만 내 시나리오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몇 달이 지나고 새로운 영상의 프로젝트가 생겨서 간단히 미팅을 하고 두 번째인가 촬영을 진행했을 때였다. 이 영상은 MBTI에 관한 실험 영상이었는데 마침, 내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실존하는 인물처럼 MBTI로 성격 분류를 해 놓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시나리오 안에서 주인공 A의 선택이 보다 실제 인격에 한 발짝 가깝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쉬는 시간에 클라이언트에게 내 시나리오 얘기를 해줬다. 그러고 나서 클라이언트에게 A의 성격유형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주 쉽다는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순도 100% 딱 INFP형이네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바로 INFP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골몰히 연구했지만, 그리고 그녀에게 인생을 불어넣기 위해 글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던 지난 시간은 결국,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던 시간이었던 건 아닐까.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의 동생 박기훈(송새벽 분)은 실패한 영화감독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정희네에서 술을 마시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거 알아? 내 얘기를 할 때 그 영화는 망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 없음, 자신의 실수, 실패를 곱씹으며 다시는 영화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고집을 부린다. 사랑하던 여인을 이 고집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제목은 ‘노팅힐 말고 후계힐’이다. 그에게 있었던 지난 시간의 일들이 그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 동기가 되어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하게 된다. 타인의 입을 빌어, 타인의 생각과 외모를 빌어 얘기하지만 결국 그곳엔 내가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영상을 진지하게 만드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나리오뿐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다. 우리는 나 자신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고, 또 끝없이 나 자신을 탐구하는 여정 가운데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의 아저씨>의 작가도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위로받은 것처럼 그도 그 자신을 드라마에서 보면서 위로받고 치유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