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배트맨>
회심의 역작이 나왔다.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은 배트맨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또한 <조커>에 이어 DC의 방향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귀하다. 이는 적지 않은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할 수 있었기에 대단한 용기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떤 면이 <더 배트맨>을 역작으로 만들었을까?
누아르와 심리 스릴러, 대범한 시도
이 영화를 두고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이 극명하게 나누어진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더 배트맨>은 일반적인 히어로물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히어로물이라고 하면, 짧은 호흡과 CG로 점철된 배경, 스펙터클한 액션을 떠올린다. 마블 영화가 그 예시이며, DC의 히어로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더 배트맨>은 이러한 예상과 기대를 뒤엎는다. 우리가 마주한 건 누아르, 심리 스릴러다. 비 오는 날 밤, 도시의 풍경은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누아르 영화를 연상케 한다.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이 도시의 범죄를 추적하고 소탕하는 모습은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범죄 영화들을 참고한 것만 같다(<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그뿐 아니라, 리들러(폴 다노)의 수수께끼와 범죄 행각, 그에 따른 배트맨의 추리는 데이빗 핀처의 <세븐>, <조디악>을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까지의 배트맨 영화 중 누아르와 심리 스릴러를 이토록 강하게 표방한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가 극 전체를 지배했다. 기대했던 화려한 액션과 스펙터클은 극히 적다. 대신 도시의 어둠과 냉혈한 범죄, 배트맨과 리들러 간 대결을 긴 호흡으로 연출했다. 이러한 결정은 원작 코믹스를 존중한 것이면서, 히어로물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을 안겨줄 수 있었다. 내가 맷 리브스의 결단이 대범했다고 여긴 건 그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환기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이를테면 오스왈드/펭귄(콜린 패럴)이 나오는 장면이 그렇다. 배트맨이 추격 끝에 오스왈드를 제압하고 손과 발을 결박하여 끌고 간다. 이후 고든(제프리 라이트)과 심문을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단서를 찾자 곧바로 떠나려 한다. 그러자 오스왈드는 묶인 두 발로 힘겹게 걸으면서 배트맨과 고든에게 자기를 풀어주지 않을 거냐며 화를 낸다. 이때의 모습은 마치 펭귄이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오스왈드의 별명이 펭귄임을 활용한 사소한 유머였다.
짧지만 기념비적인 액션
누아르 분위기, 심리 스릴러에 집중한 <더 배트맨>은 액션신 비중이 다른 히어로 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다. 이는 히어로 팬들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반응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더 배트맨>의 액션이 적긴 해도 몹시 강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때리고 맞는 액션이 아닌, 호러 색채를 띠는 액션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첫 번째 액션을 살펴보자. 비 오는 날 밤 지하철역, 범죄자 패거리들이 한 행인을 괴롭히자 어두운 길 너머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쇠끼리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이내 배트맨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해당 장면은 배트맨의 발자국 소리와 마이클 지아키노의 스코어로 긴장감을 힘껏 끌어올렸다. 이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난 배트맨을 담아내면서 등장을 마무리했다. 곧바로 시작되는 액션은 난폭하고 무자비하다. 범죄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이는 호러 영화의 문법과 유사하게 연출되어 배트맨이 공포와 복수의 상징임을 시청각적으로 강하게 인지시켰다.
배트모빌의 첫 등장도 마찬가지다. 펭귄이 배트맨과 셀리나(조이 크래비츠)를 향해 총알을 난사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배트맨은 없었다. 펭귄이 당황하는 사이 옆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바로 배트 모빌의 압도적인 엔진음이다. 이는 마치 괴수의 울음소리를 방불케 했다. 천천히 시동이 걸리는 배트 모빌의 위협적인 모습과 펭귄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공포와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다. 이후에 펼쳐진 배트맨과 펭귄 간 카 체이싱 신은 히어로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이외에도 정전된 팔코네의 아지트에서 모든 총알을 다 막아내며 패거리를 차례로 제압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빛과 어둠을 탁월하게 활용한 액션이었다. 공통적으로 액션의 시작을 사운드로 기대감을 한층 끌어올린 후 호러 색채가 가미된 시각적 충격으로 액션을 전개했다. 뛰어난 누아르, 심리 스릴러 영화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액션 영화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고뇌하는 히어로, 변화하는 히어로
영화 속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지독할 만큼 퇴폐미를 뿜어낸다. 활동한 지 2년 차인 배트맨도 냉혹한 히어로이면서 미숙한 모습을 보인다. 적들을 제압하긴 하지만 여러 번 얻어맞는다. 잔인한 범죄 행각을 보거나 자신의 편이 위험에 처하면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워 달려든다. 높은 곳에서 뛰어들 때는 잠시 머뭇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잘 해낸 부분도 있었는데, 그건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맞히는 것이었다. 나는 <더 배트맨>이 배트맨과 리들러 간 치열한 두뇌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작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배트맨은 큰 어려움 없이 맞춘다. 물론 중요한 키워드 하나를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등 리들러에게 농락당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수수께끼는 배트맨이 단번에 풀어냈다. 이는 배트맨과 리들러 간 추리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맞춰가는 과정에서 배트맨이 어떤 심리인지 나타내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는 의미이다.
배트맨은 스스로를 복수라고 칭했다. 고담 시의 범죄를 소탕하는 것은 부모님의 복수이자 자신의 복수였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서 활동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을 굳혀갔다. 하지만 리들러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선량한 줄만 알았던 엘리트들의 치부가 리들러에 의해 낱낱이 밝혀졌다. 더 나아가 흠결 하나 없는 줄만 알았던 부모님마저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만다. 종국에는 "나는 복수다"라는 배트맨의 말을 리들러의 추종자가 똑같이 말하자 큰 깨달음을 얻는다.
즉, 리들러의 수수께끼는 배트맨이 깨달음을 얻는 수단이자 고뇌 및 성찰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신념을 바꾸게 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배트맨은 리들러의 범죄를 미리 막지 못한 것에 한계를 느낀다. 또한 부모님의 죄를 알게 된 브루스는 배트맨의 역할과 존재의 이유에 회의를 느낀다. 도시의 지배자 팔코네와 메인 빌런 리들러에게 복수심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는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내면을 포착한다. 다음으로 후반부, 배트맨이 조명탄을 밝힌 채 선두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장면은 배트맨의 뒤바뀐 신념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배트맨은 그림자 속에서 활동했다. 범죄자들을 집어삼키는 어둠, 공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복수만으로는 이 도시를 바꿀 수 없을뿐더러 더 악화되기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스스로 빛을 내며 사람들을 구해낸다. 어둠에서 빛으로, 공포와 복수의 상징에서 구원과 정의의 상징으로 변화한 배트맨은 마침내 성장했다.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은 탁월하게 재해석된 배트맨 영화였다. 동시에 오직 배트맨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와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었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에 누아르와 심리 스릴러, 호러 색채를 추가하여 매력적인 세계를 창조해냈다. 거기에서 활약하는 배트맨은 세계 최고의 탐정이자 무자비하고 미숙한 히어로로 나타났다. 짧지만 강렬한 액션과 끊임없이 고뇌하고 성찰하는 배트맨은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희망과 구원, 정의의 히어로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그것이 <더 배트맨>이 근래 본 히어로 영화 중 단연 돋보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