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올해 초에 퇴사를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 번째 갭이어’를 갖기 위함이었어요. 1년이란 시간을 저에게 선물한 셈이죠.
‘갭이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갭이어(Gap Year)란 학업을 중단한 채 여행이나 인턴과 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을 의미해요. 유럽과 미국에서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갭이어를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최근에는 직장인들도 다음 커리어로 나아가기 전에 갭이어를 갖는 경우가 늘고 있어요. 한국에서도 갭이어라는 단어가 몇 년 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요.
갭이어 기간 동안 무얼 하고 싶으신가요?
세상에 전할 저만의 메시지를 찾고 싶어요. 메시지라고 하니 거창해 보일 수 있는데, 풀어서 말하자면 세상에서 저를 어떻게 포지셔닝할지 고민 중이에요. 오래전부터 퍼스널 브랜딩에 관심이 많아 나에 대해 탐구하고 고민해 봤지만, 여전히 저만의 색과 메시지를 찾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들을 앞으로 1년 동안 시도하고 피드백하면서, 메시지를 정립하고 싶어요. 그래서 매일 글을 쓰고 있어요.
글쓰기와 근육
메시지와 글쓰기. 저도 공감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두 번째 갭이어’라고 하셨는데, 첫 번째 갭이어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첫 번째 갭이어는 5년 전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을 때에요.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를 경험하면서 진로를 천천히 고민하고 싶었어요. 과제가 워낙 많은 학과라 학기 중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했고, 방학은 저에게 너무 짧았어요.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어딜 가고 싶은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거죠.
첫 번째 갭이어 때도 지금처럼 글쓰기를 통해 진로를 찾으셨나요?
아니요, 그때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어요. 책도 잘 읽지 않았죠. 5년 전에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초반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글도 썼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 밖은커녕, 침대 밖도 나오지 않게 되더군요. 근육이 없었던 거죠. 근육 없는 사람이 1kg 아령을 드는 게 힘든 것처럼, 저에게는 글쓰기와 독서가 그렇게 어려웠어요.
근육이라는 말 정말 공감해요. 물리적인 근육 외에도 정신적인 근육이 삶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당시에 저는 물리적인 근육도 없었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다’는데, 심신이 모두 약했죠. 학교라는 강제성이 없어지니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졌어요. 새벽 4시에 잠들면 오후에 일어나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유튜브를 보다 보면 식곤증이 몰려와 다시 잠들곤 했어요. 정신을 차려보면 새벽 2시고, 오늘 하루도 날려버렸다는 허무함과 패배감에 괴로워했죠. 신경은 더 예민해지고, 더 게을러지고, 더 우울해졌어요. 휴학의 목적이었던 진로 탐색은 멀어진 지 오래였죠.
무기력과 우울에서 달아나기
저도 몇 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늪에 빠진 기분이었죠. 이 생활에서 어떻게 빠져나오셨나요?
무기력과 우울의 중력은 정말 강력했어요. 벗어나기 위해 저녁마다 한강공원을 걷거나 일기를 쓰기도 했지만, 단발성에 그쳤어요.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죠. 이 강력한 중력을 단숨에 끊어버린 건 해외여행이었어요. 휴학 전에 계획해 둔 러시아 여행이 결국 저를 방에서 끄집어낸 거였죠.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낯선 도시를 돌아다녔어요. 서울에 있던 무기력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죠. 몸이 피곤해질수록 정신은 맑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어붙은 러시아 바다 위를 걸으며 깨달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인정했어요. 저는 자신의 하루를 책임지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요. 시베리아의 차가운 바람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 순간 눅눅한 뇌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기분이었어요.
“무기력과 우울을 끊어낸 건 여행이었다.”는 말에 공감해요. 물리적 환경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여행 이후로 복학 전까지 무엇을 하셨나요?
시베리아 바다에서 맞은 공기가 좋아서인지 몰라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갔어요. 그리고 여행 전후로 두 군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돌이켜보면, 그 두 번의 아르바이트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어요.
블라디보스톡 바다
자본가가 되어야겠다 - 첫 번째 갭이어의 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으셨나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임금 체불, 주휴수당, 초과수당 미지급 등 각양각색으로 부당한 처우를 당했어요. 처음에는 다른 직원들처럼 가만히 기다렸어요. 금방 해결될 줄 알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임금은 들어오지 않았고, 초과 근무시간은 늘어만 갔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던 저는 열심히 법을 찾아보며 고용주에게 항의했어요. 엑셀로 계산도 하고, 반박 시물레이션까지 준비했죠. 그 결과 노동청에 신고하기 직전에 미지급된 임금을 모두 받아냈어요.
싸움에서 이기는 건 꽤 통쾌했지만, 싸움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컸어요. 고용주와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것도 불편했고, 침묵하는 직원들 속에서 혼자만 유별나 보이는 것도 편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싸웠는데 다 같이 혜택을 본 것도 억울했고요. 원래 받아야 할 돈이었으니 혜택이란 표현은 어색하지만요.
이 경험으로 저는 부당한 건 못 참지만, 이를 위해 사회운동까지 할 그릇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가 되기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으셨군요. 자본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엔 어떤 것들이 바뀌셨을까요?
패기 넘치게 결심은 했지만, 자본가가 되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주변 어른처럼 저도 월급쟁이가 될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일단 취업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하루 8시간을 회사에 투자하고 근로소득과 규칙적인 일상을 얻으며, 그 외의 시간에 공부하기 위해서요. 자투리시간을 활용하는 데에는 재능이 있었거든요. 갭이어 동안 겪은 시행착오로 저를 잘 알게 된 거죠.
그렇게 저의 첫 번째 갭이어는 고용주와의 싸움으로 끝이 났고, 공모전이나 인턴 같은 스펙대신 ‘자본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갔어요. 당시에는 15도 정도 핸들을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이때를 기점으로 삶의 방향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자본가가 되겠다는 다짐 이후에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경제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었어요. 경제지식이 전무해서 일단은 닥치는 대로 정보를 접했죠. 퇴근 전, 후, 출퇴근 왕복 3시간까지 활용했죠.
2년 차부터는 정보를 완전히 줄였어요. 소화하지 못하고 휘발되는 정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1년 동안 습득한 경제 개념을 토대로, 근로소득의 대부분을 미국 우량주에 넣어두고 신경을 끊었어요. 그다음 능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어요.
어떤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키우셨을까요?
업무 관련 블로그를 만들었어요. 새로 알게 된 업계지식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만든 개인 노트 같은 것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도움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남겨주셔 보람이 있었어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그리고 그때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자책을 출간했고, 반응이 좋아서 시즌 2까지 만들었어요. 전자책을 홍보하는데 블로그가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사무실에 앉아있는 8시간이 장애물로 느껴진 날 - 두 번째 갭이어의 시작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한 행동들이 개인적인 수익으로 이어지다니 굉장한 성과네요. 회사에서의 경험은 어떠셨을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연봉에는 반영되진 않았어요. 회사에서는 저 연차 사원에게 월급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던 거였죠. 개인의 성장이 중요한 제게는 맞지 않는 환경이었어요.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깨달은 거죠.
성과를 인정받지 못했다니 아쉽네요. 이직을 고민해보진 않으셨어요?
이직도 고민했지만, 지금은 아니었어요. 자본가가 되겠다고 다짐한 이후부터 모든 순간이 ‘멘땅에 헤딩’이었죠. 이 시점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정리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졌어요. 학부까지 합쳐 한 업계에 10년 정도 있다 보니 우물에 갇힌 기분이었거든요. 그래서 갭이어를 갖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첫 번째 갭이어와 두 번째 갭이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루틴이에요. 루틴은 근육과도 같아요. 있을 땐 있는지 모르는데, 없으면 무너져요. 하루가 무너지고, 한 달이 무너져요. 몸이 무너지고, 정신이 무너져요. 첫 번째 갭이어 때도 루틴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가 쉽게 무너졌던 거죠. 그래서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저에게 맞는 루틴을 꾸준히 만들었어요. 글쓰기도 이 중에 하나예요. 모든 것이 엉망인 날에도 1분만 참고 아무 글이나 쓰면 내일이 나아져요.
루틴을 도구처럼 이용해 하루를 온전히 경영하는 연습을 했어요. 주말 중 하루, 그다음은 이틀, 연휴 때는 일주일. 혼자만의 시간을 점차 늘리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더 이상 인생을 회사에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었죠. 사무실에 앉아있는 8시간이 장애물로 느껴진 날 확신 했어요. 퇴사를 해도 되겠다고.
그때쯤 디지털 노마드로 살고 있는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다음 달에 디지털 노마드 친구들을 모아 푸켓에서 같이 일할 거라고요.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다음날 푸켓행 비행기를 샀고, 그다음 날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푸켓행 비행기가 퇴사 스위치가 되어주었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연재하실 글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
푸켓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에요. 푸켓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담으려 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짧게 이야기한 퍼스널 브랜딩, 루틴 등도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니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