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릿지 등반
어제의 교육은 오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 9시까지 산 앞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어제, 예상보다 추운 날씨와 평소 하지 않았던 고강도 운동 덕에 하산 후 나는 약간의 몸살 기운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문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 평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나에게 아침 9시 약속은 쥐약이었으나 설렘은 그 모든 문제를 이겼다. 나의 두 눈은 7시에 기적처럼 떠졌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나 보다.
어제보다 가벼운 가방을 메고 약속 장소로 도착한 나는 암벽코스를 위해 사람들과 함께 등반을 하였다. 가벼운 가방 덕인지 오늘은 실제로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인지 몸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 오늘 진짜 암벽가로 발돋움하는 거니?
그렇게 도착한 암벽 장소. 거기에는 이미 센터장님과 선생님께서 도착해 계셨다. 오늘 암벽 등반은 센터장님과 선생님, 나, S와 Y 그리고 두 분의 선배님까지 총 7명이 도전한다. 등반 방법은 릿지 등반. (여러 개의 코스를 연속으로 올라가는 등반) 사람이 많기에 선생님, 나, S와 선배님 한 분이 1조, 센터장님, Y, 다른 선배님이 2조로 연속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고작 3시간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오늘 내가 모든 암벽을 정복하고야 말겠어. 내 의지는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지!
1조 선등자인 선생님께서 등반을 하시며 퀵도르를 설치하셨다. 그 이후 2조 선등자인 센터장님이 등반하시고 드디어 내 차례.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등반을 시작하였다.
사실 어제 자연암 등반을 경험해 보긴 했지만 어제는 한 코스를 완등한 게 아니라 단지. 경.험. 만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완등을 해야 했기에 나는 심호흡과 함께 암벽을 잡았다. 차가운 암벽의 느낌. 낯선 촉감. 그 느낌은 나를 흥분하게 했다.
실내 클라이밍과 자연암 클라이밍은 정말 다르다. 그중 가장 다른 것은 역시 홀드의 차이이다. 실내 클라이밍에서는 내가 잡아야 할 혹은 내가 발로 딛어야 할 홀드가 명확하게 보인다. 하지만 자연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디를 잡아야 할지 어디를 딛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손으로 더듬더듬거리고 발을 이리저리 디뎌 가며 찾아야 한다.
이제야 밝히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오금이 저리고 불안한 감정이 차오른다. 그래서 자연암 등반이 기대되기도 했지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물론 걱정은 아주 조금만 하였지만..)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더듬더듬 내가 잡아야 할 홀드를 찾았을 때의 희열. 조그마한 틈바구니에 발을 딛고 일어날 때의 뿌듯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설 때마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이 맛에 사람들이 자연암을 등반하나 봅니다. 그렇게 첫 코스를 완등하고 내려다보는 경치는 여태껏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그렇게 완등 후 바로 뒷사람 등반을 위한 빌레이(등반가의 추락을 막기 위해 로프를 사용하는 기술)를 시작했다. 빌레이는 힘들었지만, 나의 동료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센터장님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생각보다 등반 잘하고 빌레이도 잘 보네?”
암장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센터장님의 인정이라니..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센터장님의 말에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클라이밍의 꽃은 자연암이야!! 센터장님과 선생님은 나의 등반과 빌레이 하는 모습을 연신 사진으로 찍어주셨다. (나는 사진마다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찍어주신 사진을 보니 표정이 다 썩어 있었다는 건 아무도 안 궁금한 TMI..)
그렇게 나는 하나 둘 바위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번째 바위까지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모든 바위를 완등했다. 어느덧, 점심시간 우리는 둘러앉아 싸 온 김밥을 먹었다. 서로의 등반을 칭찬하며 우리는 맛있게 점심을 먹었고 그러면서 나의 긴장은 서서히 풀렸고 그와 동시에 팔과 다리가 아파왔다.
“센터장님 근데 코스가 얼마나 더 있어요?”
“총 10코스야.”
어? 뭐지.....? 센터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태 느껴보지 못한 낯선 느낌이 나를 서서히 잠식해 갔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까지 잘했잖아? 쫄지마!!
나는 나를 다독이며 6번째 바위 앞으로 갔다. 하지만 6번째 바위는 여태껏 내가 등반했던 5개의 바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높이도 높이지만 그 어떠한 홀드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선등자의 등반을 보니 고난도 기술도 필요한 등반.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점심시간 등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바위가 미끄러워서 발을 딛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5개의 바위를 등반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 내가 6번째 바위를 등반하기 시작하자 발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나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갑자기 무시무시한 공포가 나를 덮쳐왔다. 그렇게 나는 6번째 바위를 살기 위해 등반했다. 아니 취소. 살기 위해 매달렸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다르게 6번째 바위는 중도에 등반 실패하고 강제로 하강당했다. 실패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7번째 바위, 8번째 바위 역시 강제 하강! 체력은 점점 바닥나고 시원했던 공기는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나 집에 가고 싶어!!
3번의 강제 하강 후 내 머릿속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거기다 손은 점점 부어오르고 전완근은 터질 것 같았으며 발은 퉁퉁 부어 더 이상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다.
좌절의 순간 센터장님은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우리 암장에서 제일 운동 못하지? 근데도 이 정도 따라오면 잘한 거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는 10개 바위 다 완등해봐.”
평소였으면 그냥 넘어갔을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사실 9번째 바위는 포기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센터장님의 그 말씀에 나는 9번째 바위에 도전하였고 다시 완등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번엔 등반이 아니라 기어 올라가기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10번째 하강까지 나는 10개의 코스를 끝냈다.
10개의 코스를 포기하지 않고 다 돌았다는 뿌듯함과 이제는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인생의 행복 멀리서 찾을 게 없다. 이런 순간 바로 내 옆에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없는 체력을 다해 하강을 하였고 장장 9시간에 걸친 나의 첫 등반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집 옷을 갈아입기 위해 하나씩 옷을 벗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쪽 두 다리는 멍으로 가득했으며 (역시 나는 등반을 한 게 아니다. 기어오른 거다.) 오른쪽 팔은 암벽에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거기다 왼쪽 겨드랑이에도 알 수 없는 큰 멍이 들어 있었다. 그 후 이틀간 근육통으로 몸을 못 움직인 것 역시 안 비밀..
이런 나를 보고 신랑은 너 다시는 자연암 등반 안 갈 거지? 라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기회만 되면 갈 건데? 이런 나를 보며 신랑은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연암 등반을 하며 나는 천국과 지옥을 다 경험했다. 누구에게는 지옥의 경험이 더 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는 지옥의 경험은 점점 잊고 있으며 천국의 경험을 다시 느끼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다. 그 촉감, 그 바람, 그 기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이번엔 꼭 10개의 코스를 완등해야지 라는 생각이 내 머리에 가득하다. 여태 나는 내 상태를 부정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클라이밍에 미친 사람이란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