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쁜 습관, 좋은 습관
클라이밍의 가장 큰 매력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다른 운동들은 정확한 동작 정해진 방법에 따라 운동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운동이 된다. 물론 클라이밍 역시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동작과 다양한 기술들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운동의 기본이 되어주기만 할 뿐 자신에 몸에 맞게 기술을 변형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사람마다 발달되어 있는 근육이 다르고 신장이 다르기에 같은 문제를 풀더라도 각자 문제를 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에게 쉬운 동작이 남에게는 어려울 수 있으며 그 반대의 상황도 언제나 존재한다. 나는 남들에 비해 잘하는 동작이 인 자세를 하고 당기는 동작이다. 이 자세는 순간적인 힘이 많이 들어가서 여자들은 힘들어하는데 왜 때문인지 나는 이 동작이 제일 쉽다. (추측해 보건대 가장 처음 배운 동작이라 그런 것 같다.)
반대로 내가 제일 못하는 동작은 자세를 낮춰서 몸을 늘어트리는 동작이다. 이 동작은 기본 중에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잘하지 못한다. 이 동작을 못하면 팔 근육이 쉬지를 못하기에 체력이 엄청나게 소비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동작을 잘 못해 운동을 할 때마다 센터장님에게 혼난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않은 나의 나쁜 습관. 좋은 습관은 하나도 만들지 못했으면서 나쁜 습관은 왜 이리 빨리 만들어지는 걸까? 몸치는 오늘도 눈물을 삼킵니다.
이런 나에게 어느 날 밸런스 문제가 찾아왔다. 사실 그전에도 밸런스 문제는 존재하였으나 내가 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엄연한 일 년이 넘은 클라이머 아니던가? 그래서 밸런스 문제에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실력은 없으면서 누구보다 도전 욕구는 강한 나 아니던가?
밸런스 문제는 기존 풀던 문제들과는 달리 힘과 기술을 써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잡은 홀드에 따라 몸의 밸런스를 맞춰서 하나씩 앞으로 나아가는 문제다. 거기다 우리 암장의 밸런스 문제는 작은 홀드 혹은 잡기 어려운 홀드 위주로 문제가 나오기에 더 정교하고 정확한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그렇듯 이 모든 것은 운동을 하고 난 다음 알게 된 사실! 내가 문제를 풀려고 들이댄 그 시점에는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문제를 풀기 전까지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 왜냐면 난 작은 홀드를 잡아본 적도 없고 밸런스 문제를 풀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많이 가야 3번이나 가겠어?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홀드를 잡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작은 홀드는 기존에 잡던 홀드에 비해 어렵긴 하였으나 못 잡을 수준은 아니었고 동작은 고관절이 겁나 아프긴 하였지만 그 아픔만 참으면 어찌어찌 나아갈 수 있었다.
오 생각보다 나 밸런스 문제의 신동일지도?
생각보다 많이 나아가는 자신에 뿌듯한 것도 잠시 홀드가 낮아지자 나는 여지없이 홀드를 놓치고 말았다. 아 역시 자만은 모든 운동의 적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떨어진 홀드를 잡았지만 나는 여지없이 다음 홀드를 잡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홀드가 잡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왜일까? 머리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고 있는 나에게 S는 슬며시 다가와 팁을 주었다.
“언니 여기서는 자세를 낮추고 홀드를 늘어트려서 잡아야 하는데 언니는 자세도 높고 홀드도 팔을 굽혀서 잡고 있어요.”
그렇다. 내가 제일 못하는 자세. 그 자세를 해야 다음 홀드를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써 밝혀졌다. 나는 밸런스 문제 신동은 아닌 걸로. 쳇. 도대체 신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한 가지씩 능력을 주셨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무엇을 주신 걸까? 신님! 혹시 저 만들 때는 까먹고 아무 능력도 안 주신 건 아니시죠?
아무튼 나는 그 동작을 해내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을 연습했다. 매일 암장에 갈 때마다 내가 널 풀어내고야 만다 하고 그 문제를 연습했지만 암울하게도 내 자세는 낮아지지 않았고 내 굽혀진 팔은 도저히 펴질 줄을 몰랐다. 한 번 내 몸에 자리 잡은 습관이란 녀석은 도저히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래서 습관은 잘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결코 못 잡을 것 같은 그 홀드를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수많은 연습 끝에 드디어 자세를 낮추고 팔을 필 수 있게 된 것이다라는 결말이었으면 너무 행복했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잡았냐고? 그냥 악으로 깡으로 홀드를 뜯어져라 붙잡고 버텼습니다. 악과 깡으로 안 되는 건 없으니까요!
그렇다. 연습을 계속하다 보니 기술이 아닌 손가락 힘이 늘어 이상한 자세로도 홀드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런 나를 보며 센터장님은 쯧쯧 거리셨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나는 기뻤다. 그리고 뭐 하나라도 늘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클라이밍의 진정한 매력이지! 정답이 없는 것!
그때의 나와 다르게 지금은 가끔 자세를 낮춰 홀드를 잡기도 하고 또 종종 팔을 굽히지 않고 홀드를 늘어트려 잡기도 한다. 100%는 아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청개구리인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자세로 가는 그 무모함이 더 즐거운 것 같다. 나만의 무브를 만들고 나만의 기술을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운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니 운동이 안 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