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두 번째, 자연암 등반 이야기
- 춘천, 춘클리지 등반
4월의 어느 날 암장의 게시판에 자연암 등반에 관한 공지가 적혀있었다.
등반일 : 5월 xx일
장소 : 춘클리지
모임 시간 및 장소 : 새벽 6시 암장
참가하실 분은 성함 적어주세요.
그 공지를 보자 내 가슴은 다시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다시 자연암을 등반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S야 너 갈 거야?”
“잘 모르겠어요. 언니는요?”
나는 당연히 100% 참석이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적지근한 S의 반응에 당황하며 내 마음을 숨겼다. 잠시 후 운동을 온 Y에게도 참석 여부를 물었지만 Y 역시 뜨뜨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자연암 등반 다들 원하는 거 아니었어? 나만 원한 거야?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말이다.
물론 자연암 등반은 S와 Y가 같이 가지 않아도 충분히 갈 수 있다. 자연암 등반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 둘이 간다고 해서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둘이 없으면 같이 대화할 상대도 없고 심리적으로 위축이 든다. 왜인지 모르게 그 둘이 있어야 더 등반이 잘 되는 느낌?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S와 Y 꼬시기에 돌입했다.
이번이 자연암 마지막 등반일 것 같은데.. 더 더워지거나 추워지면 자연암 못 가는데.. 당신들 춘클리지 안 가봤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 등반 예술이라는데.. 나는 매일 운동을 갈 때마다 그들을 꼬셨고 그들은 결국 나의 꼬임에 넘어가 같이 등반을 가기로 하였다. 나는야 원하는 걸 얻어 내고야만 하는 지독한 여자지!
그렇게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5월이 되었다.
5월은 날씨가 좋기에 운동이 잘 되는 달이다. 하지만 4월 말부터 나의 컨디션은 난조를 보였고 잘 되던 운동이 되지 않았다. 평소 2~3번만 떨어져서 곧 완등이 눈앞이다라고 생각했던 문제를 계속 풀지 못하는가 하면 점점 떨어지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이거 뭐지? 이렇게 운동이 안 될 수도 있는 건가? 점점 퇴화되는 실력에 비례해 좌절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암 등반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저걸 갈 수 있을까? 내가 가서 완등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는 아닐까?
저번에 갔던 리지는 중간중간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그래서 해당 리지를 완등하지 못해도 하강하여 걸어서 다음 리지 등반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 가는 춘클리지는 중간에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없어 모든 리지를 완등해야 한다고 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암장에서 이 문제도 못 푸는 내가? 나의 자신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S는 눈에 불을 켜며 언니 언니가 춘클리지 가자고 한 거예요! 언니만 빠지면 안 돼요! 라며 나를 단속 쳤지만 나는 그냥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나는 센터장님께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 등반 인원이 정해졌기에 그 인원에 맞춰 모든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걸 내 눈으로 본 상황. 거기서 내가 빠진다? 이건 민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민폐를 부릴 만큼 경우 없는 여자가 아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자연암 등반 당일.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찾아왔고 그런 걱정들 덕에 전날 잠자리에 든 나는 새벽 3시가 되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억지로 겨우 눈을 붙인 2시간. 나는 몽롱한 정신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암장을 향해 걸어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이런 심정일까? 아니지 그렇게 비유하기엔 난 어쨌든 내 의지로 가는 거잖아?
그렇게 암장 사람들과 나는 춘천으로 자연암 등반을 위해 떠났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막상 차에 타서 춘천으로 가기 시작하자 나의 걱정들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의 마음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춘클리지. 좋은 날씨 탓인지 이른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 앞 뒤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몰랐다. 이렇게 암벽등반에 진심인 사람이 많은지.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너무 좁다.
선등자의 등반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상에 네가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넌 할 수 있어 힘내자 나 새끼!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고 나는 오랜만에 자연암을 손으로 잡았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나는 그렇게 외치며 심호흡을 하고 암벽을 하나 둘 오르기 시작했다. 어? 생각보다 할 만한 것 같은데?
처음 자연암 등반을 갔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암벽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춘천의 암벽은 각이 잘 져 있어 어떤 암벽을 잡아도 잘 잡혔다. 손이 어려움이 없으니 발을 쓰는 게 더 편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 나는 거침없이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 맛에 내가 자연암을 또 오고 싶어 했지!!
첫 코스를 오르자 두려웠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기분 좋은 흥분만이 나의 몸을 감싸 않았다.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위험한 운동을 하는지. 하지만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운동을 끊을 수 없을 것이란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코스씩 오르며 점점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춘천호의 모습은 가히 예술이었다. 더군다나 날씨까지 화창하니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 모습을 보려고 다들 등산을 하고 암벽을 타는구나? 이렇게 나도 이렇게 산악인이 되나 봅니다.
물론 중간중간 어려움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잡을 곳이 없고 다리를 둘 곳이 없는 곳도 있었으며, 사라졌었
던 고소공포증이 다시 나를 찾아와 암벽 중간에서 손발을 덜덜 떨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추억을 더 아름답게 해 줄 하나의 장식에 불과했다.
총 9시간에 걸쳐 우리 팀은 춘클리지의 7개 코스를 모두 다 완등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말이다. 이 얼마나 멋있고 경이로운 기록인가? 우리 암장사람들 다 므찌다!
운동이 끝나고 다 같이 하는 뒤풀이. 센터장님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다. 너는 암만 봐도 자연암이 체질인 거 같아 라는 말을 남기시며 오늘 운동 잘했으니 다음 주부터 암장에서 운동이 더 잘될 거란 희망의 말씀도 해 주셨다. 나는 웃으며 분명 그럴 거라며 오늘 등반 데려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다음에도 또 함께 하자고 센터장님께 은근히 나의 기대를 내비쳤다.
그렇기 시간이 지나 현재, 나는 여전히 암장에서 죽을 쑤고 있다. 예전에 문제 하나당 길어야 20분을 넘지 않았는데 요즘은 하도 떨어져 한 문제를 푸는데 길게는 40분까지 소요한다. 도태된 실력은 도대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센터장님은 이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며 도대체 자연암에서 날아다니는 그 아이 어디로 간 거니? 압정을 밑에 박아놔야 쟤가 안 떨어질까?라고 하신다.
센터장님.. 그래도 전 떨어질걸요? 여긴 아무리 압정이 박혀있어도 안 죽잖아요. 제 실력은 죽지 않기 위해서만 발휘되는 휘발성 실력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