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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 늘 Sep 08. 2021

사랑 덩어리 -"코, 코, 눈"-

# 세 코.  엉켜버린 실, 꼬여버린 매듭: 응어리



# 세 코.  엉켜버린 실, 꼬여버린 매듭: 응어리 


살면서 나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언제나 불안정한 ‘실천’의 영역이다. 나는 사랑을 실천의 범주에 올려놓기 위해 인간관계 중 가장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다. 다름 아닌, ‘가족’이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피치 못하게 ‘마찰’을 빚게 된다. 그리고 그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싸운다’는 것은 나와 당신의 의견이 맞지 않다는 의미이다. 성격, 성향, 취향, 가치관 등이 다른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어긋나는 지점들은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같이 사는 삶’이 성숙해지고, ‘개개인의 인격체’가 발전하는 일이다. ‘표면적으로 싸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심각하게 불안정한,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지쳐서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더 이상 일말의 마음도 서로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모든 정이 떨어져 ‘관계의 맥’이 풀렸을 때, ‘우리’의 모습에 ‘다음’을 그려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멈추는 것이다. 다시 어울리고, 함께 성장하는 기대감을 떠올릴 수 없기에, 그렇게 완전히 갈라서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 유지’는 무조건 갈등을 피하는 것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속앓이’만 하다, 상대에게 나의 꼬인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방치하는 행위는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묻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적절히 터뜨리며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우회하여 돌아가는 것과 직진 돌파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해도 상관없지만, ‘우리’의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충분한 시간’과 ‘성숙한 사고’가 필요하다. 다투는 과정은 곧 ‘상호 조율’의 과정으로 전환된다. ‘위기’ 상황은 맞지만, 서로 ‘최후의 이상 신호’를 감지할 수 있게 되고, 진실한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된다. 용기 있게 ‘우리의 응어리’, 꼬여버린 매듭을 풀 기회, 그 타이밍을 잡을 수 있는 자가 현명한 자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해결될 갈등’은 극히 적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선 나는, 잠시 등을 돌려 멀어진 가족 구성원에게 ‘먼저 다가가기’를 선택한다. 


가족 구성원끼리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지낸다 하여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겉모습부터 안쪽까지, 단 하나도 동일하지 않은 인격체들이 살을 맞대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이 피를 공유하는 혈연관계라 하더라도, 우리는 제 각각 다른 색깔과 질감의 실처럼 전부 상이한 개체이다. 그런 실뭉치들이 모여 하나의 그물로 짜이는 동안, 충분히 엉킬 수 있는 것이다. 다툼은 ‘다름’에서 오고, 엄밀히 말하면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닌 걸 우기니까! 그럼 내가 틀렸다는 거야?"- 


누구도 위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질문이 틀렸다. 애초에 '아니다', '틀리다'라는 표현이 오류가 아닌지 숙고해본다. 그럴수록 돌아오는 아이디어는, ‘차이’ 일뿐이다. 사람 간에는 근본적으로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차이 자체’를 두고 ‘맞다, 맞지 않다’의 흑백논리는 불가능하다. ‘어느 한쪽이 그르다’의 개념이 아니라, 양쪽이 다른 것이다. 부디, ‘다름’을 바라봐야 한다. 그다음 ‘존중’이 가능하고, ‘이해’의 첫 단추가 끼워질 수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이 명백히 옳지 못한 것일 수도, 잘못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일컫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대하는 ‘첫 자세와 태도로서 존중과 이해’이다. ‘나’라는 사람의 잣대를 그 사람에게 투영하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 주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관용과 포용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식, 존중과 이해의 실천이 전제될 때, 관용과 포용은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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