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이 높으면 오히려 대환이 안된다구요?
며칠전 점잖은 복장을 한 아저씨 한분이 보증서가 나왔다며 대출을 신청하러 오셨다. 정부기관에서 보증서가 나온 이상 대출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 나이 또래(50년대 후반)이신데, 아저씨라는 표현이 올바른지는 모르겠다. 아저씨는 젊은것 같고, 할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든 느낌이고.
어디서 부터 왜 과거 이야기가 시작된지는 모르겠는데, 아저씨는 크게 사업을 하시다가 IMF 때 쫄딱 망했다고 하셨다. 나도 안다 가끔 이런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에게, 다시 볼일이 크게 없는 사람에게 하고싶은 법이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나도 아는 서울의 랜드마크는 본인이 경영하던 회사가 올렸고, 서울 어디에 큰 빌딩 한층을 본인 사업장으로 쓰고, 내 나이 일적에 아래 직원이 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 듣는걸 누가 좋아하겠냐싶기도 하다. 다만, 으스대거나, 혹은 "나 이런사람이니 무시하지마라" 하는 방어기제가 아니었고, 천장 구석을 보시면서 그저 회한에 젖은 옛이야기를 하시는것 같아서 들으면서 나는 계속 전산을 치고 있었다.
오래된 고객정보 속에 직장 "(주)xx기업" 이라는 단어가 보였고, “아 사장님 혹시 그때 회사가 (주)xx기업 이셨나요?” 하고 묻자. 소스라치게 놀라시면서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셨다. "거래는 안하신지 오래되셨는데, 고객정보는 남아있으니까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드렸다.
꿈꾸듯한 표정에서, 갑자기 눈이 벌개지시길래, 하늘에 둥둥떠 있던 청년을 땅으로 끌어내려 중년 남성으로 나이들게 한 장본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나 실수했네? 괜히말했다'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 말씀을 못하셔서 휴지를 드렸다. 눈가를 닦으시더니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하네" 한마디 하셨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지고 대출신청은 다 하시고 가셨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빚을 다 갚은 이야기, 힘들고 열심히 살아오신 이야기들을 들었다. 동생을 돌보다 실수로 동생을 울린 누나가 된것처럼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저는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빚을 다 갚는게 정말 아무나 하는일이 아니에요" 하면서 그 눈가를 마르게 하려고 온 말을 다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푸쉬킨이 그러지 않았나, 내가 고객들에게 속은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속고 싶을 때도 있다. 물론 그 이야기에 약간의 과장은 있을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은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날 마감 후 다른 모든 고객들보다 그분의 대출이 가장 먼저 올라갔다. 정말 바쁜데도, 이어서 2금융권 대출을 우리쪽으로 대환할수는 없나 한참을 들여다봤다.
대출을 너무 잘 갚아주셨고, 연체하나 없어서, 등급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오히려 정부상품 대환(2금융권 대출을 1금융권으로 전환)은 대상자가 안되셨다(정부상품 대환은 등급이 일정수준 "이하"여야 한다). 오전에 왔던 상습연체고객은 오히려 등급 자체만 보면 (등급이 낮아서) 대환이 가능하던데.
난 모르겠다. 신용 등급이 낮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정부에서 대환 자금을 쏟아내니, 신용등급이 높은 사람들이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을 업고 가는 이 상황 정말 몇년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입때는 은행원이란 부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은 저신용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