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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Sep 05. 2023

갓김치의 갓생


‘오늘 저녁은 뭐 먹지?’


평생토록 하게 될 인류 최대의 고민이라지만 열한 살 남짓한 꼬마 아이가 하는 고민치 곤 제법 진지하고 묵직했다. 어젯밤, 고단함에도 두 딸의 끼니를 걱정하며 만든 엄마의 김치 볶음은 죄송스럽게도 물릴 지경이었다. 신김치 하나에도 밥 한 그릇 뚝딱하던 내가 그날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슬렁슬렁, 방 한 칸 옆에 딸린 작은 부엌으로 향했다. 흐릿한 불빛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냉장고를 열어보니 버건디 레드의 반찬통, 김칫국물이 멀겋게 물든 불투명 반찬통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월출산 산자락, 물 좋고 산 좋다는 전라도 외갓집에서 공수해 온 김치 임에 분명했다.


선물 상자를 열어보듯, 설레는 마음으로 김치통을 하나 둘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김치의 향연이 펼쳐졌다. 파김치, 갓김치, 배추김치, 알타리 김치. 종류도 참 다양하지. 알싸한 고춧가루 향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그곳이었지만 지금은 눈물 나게 그리운 외갓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따 참말로. 요로코롬 어린것이 김치를 솔찬히 잘 먹는구먼.”


대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동네 어르신, 외할머니의 눈빛이 떠올랐다. 솔찬히 사랑하는 파김치와 갓김치를 선택했다. 하얀색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폭을 입고, 고운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누워있는 파김치. 꺼칠꺼칠 상투를 둘러 쓰고 누워있는 갓김치. 야들야들. 내 뱃속은 금세 허기를 내뿜었다. 밥에 물을 말아 김치와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최후를 그렇게 맞이하도록 하기엔 어쩐지 야속한 모양새였다. ‘무언가 아쉬운데 말이지.’ 까치발을 들고, 냉동실을 열어보았다.



얼음, 멸치, 고춧가루, 말린 나물들......


야심 차게 손댈 요릿감이 없어 시무룩해지려던 찰나, 겹겹이 들러붙은 김 한 톳이 눈에 띄는 게 아닌가. 재빨리 김을 꺼내 들고선 작은 상을 폈다. 어린것이 눈에 본 것은 있었나 보다. 소풍 때나 먹던 김밥을 떠올리며 가지런히 김을 펼쳤다. 더운밥을 한 주걱 퍼서 흩뿌렸다. 뭉글뭉글, 하얀 목화솜 요에 새근새근 잠든 파김치와 갓김치를 조심스레 얹어보았다. (‘요 녀석들 오늘은 합방일세.’ 당연히 이 생각은 지금의 내가 한 생각이다.)



그렇게 탄생한 요리는 갓김치의 갓생을 알리는 갓김치 김밥.


칼질로 보기 좋게 썰기엔 힘이 없는 여린 손이었던지라 한 입 그대로 베어 물었다. 혀 끝을 톡 쏘는 겨자의 맛 때문인지, 그리움의 맛 때문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최초 발명한 갓김치 김밥은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도 행복한 별미가 되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파, 갓김치 김밥은 나의 최애 음식이었는데 언제부터 잊고 살았을까?



2023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여수 여행을 갔다. 빠듯한 일정에도 놓칠 수 없는 건 맛집 대탐방. 게장, 돌문어 삼합. 하모하모 샤브까지. 입이 즐거운 여행이었다. 셋째 날 아침, 부지런히 혼자 나간 남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어떤 거 먹을래?”


“앗?! 갓참치 김밥이 있어?”



갓김치 김밥이라니 원조자가 누굴까? 나랑 친했던 사람인 거 아냐? 착각의 늪을 허우적거리며 남편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 모둠김밥.



열한 살의 내가 만들었던 갓김치 김밥에서 한 시대를 걸쳐 발전한 갓참치 김밥. 알싸한 갓김치와 더불어 고소하고도 텁텁한 참치가 어우러져 구미를 당겼다.


“갓김치 김밥은 말이야~~ 엄마가 열한 살 때 말이야~~~ 이 엄마가 원조인데 말이야... ”


듣는 이 하나 없지만, 갓김치 김밥의 원조에 대해 한참 연설을 해댔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원조라고! 열한 살의 내가 말이야!


... 다들 한 번씩 먹어보더니 실망한 눈치가 한가득이다. 옆에선 눈살을 찌푸리며 거부하는데 혼자선 뭔지 모를 뜨거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마음의 허기를 입으로 채웠던 시절.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쌉싸름한 파김치와 갓김치로 톡톡 잊었던 시절.


낮은 지붕 아래서 달그락거리던 열한 살의 내가 외로움과 적당한 행복을 잘 머금고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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