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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03. 2023

동경과 열정사이




외갓집을 떠나 난생처음 큰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육지가 아닌 섬이고, 대한민국의 끝이라 좋을 게 없다는 어른들의 말이 많았지만 나에게 있어선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 엄마랑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만큼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제주도에서 처음 살게 된 곳은 이모집이었다. 엄마 동생 집에 얹혀살게 된 것이다. 이모부, 이모, 사촌동생 두 명까지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 계절이 길진 않았다.


이모 집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걸로 보아선 아마도 내 집 같지 않았던 그곳에 어지간히 들어가기 싫었던 모양이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 뒤꽁무니를 좇아 학원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제주도는 육지가 아닌 섬인데, 육지인 시골에서는 구경조차 못했던 학원을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낯선 ‘학원’의 풍경이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서예학원, 주산학원, 태권도 학원, 피아노 학원 등등. 가짓수도 여러 개였는데 그중 가장 재밌던 곳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어머! 손가락이 어쩜 이렇게 길고 예쁘니? 피아노 정말 잘 치겠다.”


친구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따라갈 때면 원장 선생님께서는 나의 손을 보고 연신 감탄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생을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한 그분만의 전략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당시엔 기분이 좋아 이리저리 기웃거리곤 했다. 어느 날부터는 다른 학원은 재껴두고 매일 피아노 학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였다. 친구가 레슨을 받으면 혼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서 빨리 친구의 레슨이 끝나고 놀이터에서 가서 뛰어놀 시간을. 그리고 언젠가 내가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될 날을.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피아노 소리와 선율로 세상에 울려 퍼지는 게 신기했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 더욱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될 것만 같았다.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흥얼 거렸지만, 눈으로는 부러움을 담아 친구를 흘깃거렸다. 엄마의 강요 때문에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는 친구는 매일 반복되는 연습이 지겹다며 투덜거렸다. 배부른 소리 한다며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각자에게 사정이란 것이 있으니 참아보기로 하였다. 친구에게는 학원에 다니고 싶지 않지만 다녀야 하는 사정이란 게 있듯이, 나에게는 학원에 다니고 싶지만 다닐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었다.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라도 해볼까 고민하다가 그 마음을 접었던 기억이 난다. 말로서 확인받을 나의 형편에, 가득이나 작은 키가 더욱 쪼그라들까 염려하며.



멜로디언으로 친구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흉내 내 보았다. 음악 시간에 배운 대로 눈으로 음표를 읽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드넓은 피아노 건반 위에 춤을 추듯, 연주했던 친구를 흉내 내고 싶지만 당연히 되지 않았다. 좁은 건반 위에서 춤을 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인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다가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랄까.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이름 모를 이들, 피아노 선율에 맞춰 속삭이듯 고백하는 찬양 사역자……. 나의 눈에는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들처럼 위대해 보였다. 그의 손가락과 번갈아 바라보게 되었던 가늘고 긴 나의 손은 어린 시절의 서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지나고 어른이 되었다. 일단 거금을 들여 신디사이저(일명: 디지털 피아노의 한 종류)를 장만했다. 결혼 후 찾아온 선물 같은 시간,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고 친한 동생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구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이렇게 표현해갈 수 있구나. 내가 연주하는 반주에 맞춰 찬양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언젠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날도 올까?’ 몽글몽글, 일렁이는 설렘과 함께 말랑말랑, 서러움이 씻기는 시간이었다. 내 힘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고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행복한지 몰랐다.







그래서! 피아노를 아주 잘 치게 되었냐고?


아니 아니다. 안타깝지만 결코 아니다.


배우면 곧 잘할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물론 굳어진 어른이 되어버려 유연함을 지닌 어린 손가락과 뇌가 아니었기에 배우는 일이 더뎠으리라. 하지만 어떤 일이든 배우는 순간에 머무르고, 수십 번 반복하는 연습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겐 피아노를 향한 동경만 있었지, 수많은 노력과 인내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기나긴 인내의 시간과 노력의 시간을 간과하면 안 됐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다.



어느 날 지인의 초대로 피아노 연주회에 갔다. 눈을 감은 채, 열정적인 연주 소리에 귀를 호강시키던 중, 살며시 눈을 뜨고 피아니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피아노를 치는 힘 있는 손가락뿐만 아니라 목, 어깨, 얼굴, 데콜테까지……. 잔근육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온몸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평생 피아노와 살았을 그녀의 삶, 인생이 그녀의 얼굴과 몸에 녹아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삶이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손가락이 길어 피아노를 치면 잘 쳤을 거야.’라는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노력과 고뇌로 이루었을 피아니스트의 삶을, 한순간의 동경과 열망만으로 갖고 싶다 말하기엔 너무 얌체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어릴 때 형편상 피아노를 못 배워서 서러웠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서러움’보다는 그때 배우지 못했던 ‘아쉬움’이란 단어가 적절한 것 같다. ‘서러움’보다는 ‘아쉬움’이라는 표현이 어린 나를 달래기에 더욱 적절하다. 그리고 기회를 가져봤지만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피아노를 칠 열정은 나의 동경을 따라잡기엔 무리였던 걸로 생각된다. 쉽사리 넘봤던 피아노에 대한 동경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한창 피아노 배우는 일에 신이 난 두 아이의 연주가 이어진다. 듣고만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어쩜 이렇게 잘 치니? 너무 아름다운 연주야!’라고 감탄하며 이야기하지만, 나는 안다. 매일매일 연습하는 시간만큼, 매일매일 노력하는 시간만큼 아이들의 연주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내가 쌓았어야 할 시간의 분량을 아이들이 채우는 느낌이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차곡차곡 쌓아가는 세월의 분량, 노력의 분량 말이다.



요즘 나는 또 다른 상념에 빠진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통상 관념 사전》에서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글을 잘 쓴다는 뜻이다.”



비단 아름다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피아노 치는 일뿐이랴. 어린 시절에는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미끄러져가는 손을 떠올렸다면, 요즘에는 노트북 타자 위에서 춤을 추듯 문장을 그려나가는 손을 떠올린다. 잠을 자다가도, 밑도 끝도 없이 리드미컬하게 문장이 떠오른다. 다음 날 일어나면 안타깝게도 건져낼 것 하나도 없는 형태로 날아가 버려 문제이긴 하지만.



꿈을 꾸는 건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어떠랴. 박완서 작가님도 마흔이 넘어 등단하셨는데 마흔이 넘었다고 꿈을 못 꿀 일도 없지 않을까. 꿈을 꾸는 것과 동시에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일에는 인생에서 한순간, 쉽게 얻으려는 ‘로또’ 같은 한방이 아니라 차곡차곡, 작은 부분까지 섬세한 노력으로 쌓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피아노를 향한 동경은 나의 타오르는 열정을 이끌어내지 못해 일단락되었다. 하나, 글쓰기를 향한 동경은 열정과 노력으로 꾸준히 쌓아갈 수 있길 기도해 본다. 매일 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40장씩 원고를 써 내려갔던 박완서 작가님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더욱 예사롭지 않게 주책없이 설렌다. 꿈을 꾼다는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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