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의 자수 Sep 22. 2023

누군가의 앞에 서있는 나는



© helloimnik, 출처 Unsplash



아홉 살, 언니와 나는 전라도 시골 외갓집에서 살게 되었다. 엄마 없이 지냈던 일년 반의 시간은 어린 나에게, 혹독한 이별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일찌감치 철이 들었던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보챌 수 없었다. 그리움을 달랠 길은 그저 뒷산에 올라 마른 땅에서 자라는 풀잎을 쭈그려 앉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마당 평상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일, 이제 막 봉오리가 맺을락말락 하는 목련을 보면서 봄이 오는 그 날에.. 엄마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엄마가 온 날, 그날엔 시끌벅적한 명절 분위기에 온 동네가 한껏 들떠있었다. 한들한들 춤추는 나무의 장단에 맞춰 학교 종이 울리자마자,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부리나케 뛰어간 그곳에 엄마가 있었건만, 엄마는 수많은 친척들 틈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상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도 엄마 또한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마음을 몰랐던 걸까? 혹은 내어맡긴 나를 안아주는 게 어색하고 미안했던 걸까? 나보다 이모들이 더 반가웠던 걸까? 그렇게 엄마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쭈뼛쭈뼛,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오랜만에 불러보았다....“엄마야~~~” …


내 딴에는 최대한 다정하게, 그리고 정겹게, 내 나이만큼의 귀여움을 담아 엄마를 불렀다. 하지만 엄마와 이모들은 “엄마 야!”가 뭐냐고 “야”를 붙인 것을 나무라셨다. 한 순간에 난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버렸고, 엄마와 나 사이, 선뜻 다가갈 수 없었던 거리만큼이나 마음은 더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차라리 나와 엄마 사이에 수많은 친척들과 사촌들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북적북적,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내가 실망한 것을 아무도 몰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홉살난 딸이었던 나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엄마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엌 문지방을 넘어 한 발만 옮기면 엄마가 있는데 그 엄마는 너무 멀리 있었고, 손 내밀 수 없었다. 엄마를 흘깃흘깃, 훔쳐볼 뿐이었다. 먼발치에 서있는 엄마를 보다가, 시끌벅적한 잔칫집을 내다보다 그만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던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의 문턱에 서면, 종종 나는 아홉살의 나와 겨우 서른 즈음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를 만나러 가기전, 경쾌하게 불었던 가을 바람이 엄마를 만난 후 오히려 쓸쓸한 가을 바람으로 변해버린 그날. 그날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때의 나를 종종 떠올리는 건, 아마도 그때의 기억은 ‘나’라는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중요한 정서적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담이론 중, 대상관계(object relationship)이론에서는 한 사람의 성장에 있어 어린시절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 경험을 중요하게 본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고, 평생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아기에게 있어 최초의 대상이자, 중요한 누군가는 바로 엄마일 터이다. 종종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의 이름, 직업, 나이, 성별 등을 떠올리기 쉽상이지만 대상관계이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선 항상 다른 누군가, 대부분은 엄마를 떠올리게 되어있는 것이다(a self in relation to an other) . 나는 자식을 키울 수 없어 무력했던, 어떻게 다가가는지 몰라 망설였던 엄마 앞에서 다가가지 못한 채 울고 싶었던 아이였다.



엄마의 품을 기다리던 아홉 살의 나를,

자식을 키울 수 없어 보내야만 했던 서른 즈음의 엄마를,

오랜만에 만나 먼발치서 서로를 바라보았던 우리의 가을날을,

조각난 퍼즐같았던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본다.



당신은….

어린시절 그때, 누구를 떠올리겠는가?

그 사람 앞에서 당신은 누구였었는가?






“사람은 양탄자처럼 짜인

과거와 현재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Mitchell)"



“내(I)가 생각하는 나 자신(Me)이란

타자와의 상호작용한 결과로서

일반화된 타자다(Me=generalized other).

'나'라는 개념에는

이미 살면서 경험한

수많은 '다른 사람'이 들어있다

(Mea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