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의 자수 Oct 22. 2021

‘나는 가수다’가 아닌 .......

‘나는 자수(刺繡)다’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킨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가수들이 모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노래를 해석하고 열정적으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청중 평가단에게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경연답게 출연한 가수들은 다른 참가자에게 질세라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관중들은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갖은 기교와 고음을 동반해 소리를 질러야 청중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들 틈에서 고요하게 잔잔히 읊조리듯 노래하는 가수가 있었다. 그녀는 마치 경연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렇게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다. 경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초연한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동과 울림을 받았던 이유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던 모습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있어 외부의 목소리가 아닌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 있게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철학을 드러낼 수 있는 내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녀는 정녕 가수였다.    

  

나에게도 ‘나는 00다’라고 흔들림 없이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의 시선을 염두에 둔 정체성이 아닌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보는 정체성이 무엇일까?

집단상담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별칭"을 짓는 일이다. 나는 남들에게 뭐라고 불리고 싶은가? 나의 존재감을 어떻게 한 단어로 드러낼 것인가? 별칭과 함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별칭을 짓는 일은 ‘나는 누구인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나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그 속에 담겨있다. 집단상담에 참여하고, 운영할 때마다 나는 각기 다른 별칭으로 나를 소개하곤 하였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에게 불리었던 별명 "뺄래기똥(제주도 방언 사투리)"부터 한 군데 안주하지 못하고 늘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담은 "떠남". 지인들이 ‘주토피아’에 나오는 “쥬디”와 닮았다고 해서 “쥬디”, 집단상담에 참여했을 때 배가 너무 고파서 ‘배고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나여서 ‘하고파’, 옛날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보고파…….’의 의미를 합친 "고파". 등등.



이 모든 별칭은 나의 이야기로 시작되었지만, ‘나’라는 존재가 진득이 배어나는 별칭은 아니었다. 어쩐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평생토록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핫한 “단어”가 필요했다. ‘나는 가수다’처럼 나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그 단어.

수많은 고민 끝에 문득 떠오른 단어는 "자수"였다. ‘나는 가수다’는 아니고, ‘나는 자수(刺繡)다.’ 오. 어쩐지 마음에 드는데. 단순한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일단 나는 자수 옷을 무지 좋아한다. 아주 중요한 면접을 준비할 때였다. 친구들에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냐고 물었다.

“여름이니 재킷은 무리고, 하얀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그거면 돼.”

“그래? 음…….”

블라우스라고는 자수가 수놓아진 옷 밖에 없는데……. 자수 블라우스와 정장 치마를 사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대박. 넌 블라우스도 자수가 박혀있네.”  

서로 빵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수 사랑은 이토록 대단하고 한결같다.      


무얼 그리도 수놓고 싶었던 걸까. 아름답게, 알록달록하게 꽃이든, 나비든, 예쁜 자수가 놓인 옷이 왜 그토록 좋을까. 자수를 향한 사랑은 비단 겉으로 드러난 ‘옷’뿐 만이 아니다. 사실 내가 아름답게 수놓고 싶은 부분은 나의 내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상처 난 부분을 아름답게 가려줄 자수. 모나고 헤진 부분도 아기자기 예쁘게 만들어 줄 자수가 간절히 필요했다. 다른 사람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상처나 모난 부분을 그럴듯하게 애써 가리기 위함은 아니다. 그런 자수였다면 의미 없는 허구의 삶일 뿐이다. 상처나 모난 부분을 알아주고, 돌봐주면서 ‘나’를 나로서 맞이하는 일. 그 일들을 통해 내 마음에는 하나, 둘 촘촘하고 아름다운 자수가 수놓아져 있다.      


내 마음의 자수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수놓는 일을 하도록 이끌었다. 해진 옷도 아기자기한 "자수"로 예뻐지듯, 상처 난 마음에 아름다운 자수를 수놓아 자신 만의 특별한 색채를 지니도록 하는 일. 내가 하고 있는 ‘상담’을 나만의 표현으로 묘사해본다. 우리네 삶은 기쁨, 행복만이 아닌 슬픔, 절망의 순간이 비일비재하게 많다. 그림책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에서는 작은 동그라미가 푸르고 커다란 꿈, 새빨간 열정, 투명한 상상, 갈등, 날카로운 아픔, 어둠을 만나 고유한 내가 되는 여정이 그려진다. 마주한 갈등, 날카로운 아픔은 결국 ‘나’에게서 떼어내 버릴 것이 아닌, ‘나’에게 특별하고 근사한 하나뿐인 무늬를 남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날카로운 아픔과 어둠을 뚫고 나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흔적, ‘자수’는 그 사람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 믿는다.      



지금도 나는 각 사람이 지닌 ‘마음의 상처’라는 도안에 열심히 ‘수’를 놓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가수다’의 그녀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지금은 상처 속에 울고 있지만 마침내 그들이 자신만의 특별한 “자수”를 바라보며 함박웃음 짓는 날들을 꿈꾸며…….     


     

p.s 그런데 나는 왜 또 ‘다방면’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렸을까? 본캐가 아닌 부캐가 너무 많다. 어느 하나에 안주하지 못하고, 붕붕 떠다니는 나. 복잡하게 말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자수’ 시 ‘다방’ 면. 어디쯤이라고 해두지 뭐.      



자수(刺繡): 옷감이나 헝겊 따위에 여러 가지의 색실로 그림, 글자, 무늬 따위를 수놓는 일. 또는 그 수(繡)

이전 03화 동경과 열정 사이 (한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