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
“마트가 없어 불편하죠? 익숙해지면 그냥 있는 데로 먹기도 하고, 딱히 뭐 안 해 먹기도 해요. 안 해 먹어도 괜찮아져요”
부암동에 이사 온 지 2년쯤 되었을 때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이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았다는 이웃에 사는 어르신이 그런다. 요즘은 온라인에서 아침에 장을 보고 주문하면 저녁에 문 앞까지 배달을 해주지만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그런 서비스가 없었다. 장을 보려면 차를 타고 어디든 나가야 했다. 참 불편했다. 그런데 이웃들이 하나같이 “살다 보면 괜찮아져요” 뭐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뭐가 괜찮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좁고 가파른 골목길에 주차장도 마땅하지 않아 차도 여기저기 긁기가 쉬운 동네다. 그런데 다들 차가 좀 긁혀도 뭐 그렇게 화내지 않는다. 한 번은 이웃집에 새 차가 긁혔다. 누가 긁고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차주인 왈 “자진해서 자기가 긁었다고 얘기하면 좋은데 뭐 어쩔 수 없죠, 많이 긁힌 것도 아니고 살짝 스친 건데요. 이 동네 살며 차 가지고 다니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러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블랙박스 파일이랑 골목길 CCTV를 보면 찾을 수도 있을 텐데 답답했다. 왜 다들 ‘도라도 닦은 사람’처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모습인지 그때는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개발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주변에 인접한 신영동, 평창동, 구기동 다 그런 분위기다. 보통은 자기 동네를 개발하려고 애쓰지 않나. 지하철이 생기고, 도로가 닦이고 아파트가 지어지고, 땅값이 올라가고. 그런데 개발이 된다고 하면 ‘싫다’고 하는 동네가 바로 우리 동네다. 살고 있는 집 앞에 도로를 넓혀준다고 하는데 극구 반대한다. “도로 닦이면 차가 많이 다닐 텐데, 시끄럽고 귀찮아. 지금이 좋아” 지하철이 생긴다니 플래카드를 들고 반대한다. 지하철 다니면 사람이 많아져서 번잡하고 시끄러워진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옆 신영동 역시 재개발한다는 말만 30년째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해서 “정말이지 이 동네, 조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다 모였나 보네”하고 말았다.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사람들이 지키고 싶었던 조용함이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나 역시 이 동네 사람이 다 된 걸까? 어느 순간부터 없으면 없는 데로 살게 됐다. 꼭 다 갖추지 않아도 삶은 그럭저럭 잘 돌아갔다. 간장이 없으면 소금으로 대신하고, 그 마저도 없으면 그냥 다른 거 해 먹으면 된다. 뭐 차가 조금 긁히는 일이 있어도 ‘그래, 어쩔 수 없지’ 불편한 일이 좀 있어도 ‘그래, 내가 손해 좀 보고 말지’ 그러고 말게 됐다. 하나하나 따지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며 쫓아다닐 수도 있지만, 그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것들이 그냥 괜찮아졌다. 참 신기한 일이다. 무엇보다 이 동네에 조용함을 사랑하게 됐다. 그러게, 이게 말이 쉽지,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암동이란 동네가 외지인에게 처음부터 쉽게 자리를 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밀당을 하듯 마음을 몇 번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이 동네에 젖어들게 된다. 독특한 매력을 가진 동네임에는 분명하다. 토박이가 아니더라도 직장이 가까워 혹은 나처럼 남편 손에 이끌려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몇 년 만 버티고 살다 보면 다른 동네를 못 가게 된다. 높은 건물이 있고, 시끄러운 곳이 어느 순간부터 어색해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심에 나갔다가도 자하문 터널을 지나 산 능선을 보며 ‘우리 동네야, 돌아왔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걸까?
부암동 옆 동네, 경복궁 옆 통인동에는 서촌을 동경한 60대 건축주가 의뢰해 ‘brickwell’이란 건축물을 지었다. 공공시설이나 문화시설도 아닌데 1층 공간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정원으로 설계하고 중앙을 텅 비워놓았다. 난 이 건축주가 어떤 마음으로 그 건축물을 의뢰했을지 이해가 된다. 부암동에 사는 사람들도 이에 못지않은 동네에 대한 애정이 있다. ‘참 이 동네 이상해, 사람들도 이상한 것 같아’라고 했던 나 역시도 이곳에 살면서 그 이상한 사람이 되었으니깐. 기꺼이.
* 중앙일보 <더, 오래> 김현정의 '부암동 라이프'로 연재 중입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