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영화제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OTT 서비스를 통해 각자 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시대에 한날한시에 모여 같은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에서 웃기도 하고 눈물을 닦기도 하며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함께 경험한다.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영화제의 매력이지만 무엇보다도 부러 영화제 기간에 특정 영화를 선택한 사람들과 느슨하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웃음의 쓸모’가 올해 슬로건인 2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시우프(siwff)에서도 영화들을 보며 많이 웃었다. 그리고 웃은 만큼 마음이 아리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며 이번에 만난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관람한 순서대로 소개한다.
담요를 입은 사람 (Blanket Wearer)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 숨 쉬는 것만으로 돈이 술술 새어 나간다는 사실을 느끼며 무력감을 느끼거나 분노해 본 적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담요를 입은 사람은 이런 생각에 인생을 다르게 살아볼 수는 없을까 고민해 봤던 사람이라면 공감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여정을 보여준다.
감독은 한국에서 시스템 속의 쳇바퀴 굴러가는 삶이 행복하지 않아 서른 살을 앞두고 워킹 홀리데이로 영국에 왔지만, 한국에서와 비슷한 삶에 결국 회사 밖의 삶을 시작한다. 한화로 약 150만 원인 영국 런던의 월세, 이 사실은 이내 존재하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돈을 내야 하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이에 무력감과 분노를 느낀 감독은 살기 위해서는 잘 곳과 먹을 것, 이 모든 것을 0원으로 해결하며 살아가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무력한 것보다 무모한 것이 낫다고 선언하면서.
중고 자전거 대여를 시작으로 대안 주거 활동가에게 연락한 감독은 다른 이가 여행을 가면서 맡긴 카날에서 지내기도 하고 빈 건물에서 생활하는 스쿼팅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스킵 다이빙’이라는, 쓰레기통에서 멀쩡한 음식을 구해다가 먹는 일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음식들이 함부로 버려지고 있는지, 이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게 된다. 친환경을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 잘 살고 싶은 마음에, 무력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시작한 새로운 방식의 살기가 어느덧 친환경과 자본, 주거난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감독은 자급자족 공동체, 대안 주거 운동가, 히피 등, 여정에서 마주친 많은 이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배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지점 없이 다 받아들이기보다는 뚜렷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의문을 가진다. 생활하면서 생긴 의문들을 가감 없이 공동체 일원들에게 질문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왜 해소되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올드채플팜에서 ‘어디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한가요?’라는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던 일은 여행의 목적의식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히피로, 누군가는 거지로, 누군가는 데르비쉬로 보는 감독의 여정은 어디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냐는 질문의 답을 찾아 떠돈다. 나의 자리를 찾는 여정은 꾸밈없이 솔직하다. 불안과 한숨이 숨길 수 없이 새어 나오거나 상황이 힘들 때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흘러나오는 유머와 농담은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가난을 피하고자 노력하는 삶이 아닌 가난으로 뛰어드는 삶, 담요를 입은 사람의 여행기가 이토록 특별하면서 호소력이 짙은 것은 새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방식과 자리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애국소녀 (K-Family Affairs)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국에서 5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걸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이들의 피땀 눈물이 흘렀음을 느낀다. 하지만 선거철 우리의 마음은 정말 기쁘거나 설레기만 할까? 다큐멘터리 애국소녀는 이런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 응답한다.
25년 차 여성인권 운동가인 어머니와 30년 차 공무원 아버지를 둔 감독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애국 소녀로 자란다. 하지만 세상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뒤에 자신만의 방식과 방향을 고민한다.
가족의 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맞물리고, 청년기에 군부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을 겪은 부모 세대와 청년기에 세월호 참사와 미투 운동을 겪은 감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아픔도 드러난다.
이전 세대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민주주의라는 믿음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흔들리고, 공무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에게 무거운 마음을 담아 전한 편지는 명확한 답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미투 운동을 하며 감독은 동료들을 만나고, 연대하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운동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간다.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와 아버지에 얽힌 오랜 질문을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고, 나름의 답신을 받는다.
다큐멘터리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시종일관 유머와 재치를 잃지 않는다. 다른 관객들과 함께 영화가 보여주는 유머에 웃다가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에 마음이 아렸다.
때로는 떨리고 때로는 울음이 묻어나올지라도 자신의 방식을 모색하길 멈추지 않는 감독의 목소리는 세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무너졌을지언정 우리 주변의 함께하는 사람들을 향한 믿음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와 미투 운동 이후에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지, 무얼 원하는지, 이제 집회가 허용되지 않은 광장을 비추며 감독은 자기 자신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레아들 (Reas)
다큐멘터리와 뮤지컬의 조합은 확실히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여성 교도소가 배경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편견을 계속해서 부수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새로움과 더불어 현재와 과거, 재구성된 현실의 경계를 가늠했다.
여자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뮤지컬 영화 레아들은 그 안에서 사랑과 우정, 새로운 가족을 발견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 속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 지난 시간의 재현과 곧 다가올 석방을 위한 예행연습과도 같은 장면이 혼재한다.
갑자기 음악이 흐르며 한 수감자가 자신이 체포되었을 때의 상황을 노래하기 시작하고 다른 수감자들이 뒤에서 춤을 추며 하나의 뮤지컬 장면을 만든다.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며 배경 천으로 가려져 있던 교도소의 벽면이 드러나고, 뮤지컬 장면이 과거의 재현이었음이 드러난다. 출연자들은 교도소 안에서 결성한 밴드를 통해 자신들의 내력을 밝히며 소리치듯 노래한다.
어떻게 이 영화를 촬영한 것일까 궁금증에 검색하던 중 감독의 홈페이지에서 작업 노트를 발견했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이들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출연진이 정해진 대사를 틀리는 장면을 집어넣어 현재와 과거의 재구성 사이에 틈을 만든다.
전문적으로 노래와 춤을 배우지 않은 출연자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재구성한다. 그 과정을 통해 폭력과 상처가 있던 자리를 노래 부르고 춤출 수 있는 자리, 자신을 표현하고 즐길 수 있는 자리로 바꾼다. 출연진들이 과거에 수감자로서 억압받던 교도소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무대로 재해석된다.
밴드를 결성하여 교도소 안에서 서로를 보살펴주는 가족 만들기, 권투 가르쳐주기, 함께 보깅 댄스를 연습하기, 미래의 꿈과 희망을 말하기, 몸에 새긴 타투의 의미를 밝히기 등 재치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출연진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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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우프(siwff)에서 '웃음의 쓸모'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무슨 이야기를 하건 유머와 재치를 잃지 않는 영화들을 만났다. 자신의 이야기 또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두려움과 헤매는 과정까지 모두 담아 표현한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
약하기 때문에, 그래서 상황을 부드럽게 모면하기 위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웃는 것이 아니다. 계속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때로는 버거운 현실을 농담의 힘으로 소화하기 위해, 옆의 사람과 함께 웃기 위해 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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