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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비소 Aug 07. 2024

<여행자의 필요>와 디아스포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언어의 미끄러짐과 균열, 투과해서 보이는 당신 

 프랑스에서 온 이리스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직 검증되지 않은, 독특한 불어 수업을 진행한다. 여행을 할 때나 쓸 수 있는, 길을 묻거나 물건의 가격을 묻는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아주 깊은 이야기를 불어로 할 수 있게 만드는 수업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수업에서 이리스는 젊은 여성과 불어 수업을 한다. 젊은 여성이 피아노를 쳐도 되겠냐고 묻자 그러라고 답하지만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발코니로 나가버린다. 이리스는 피아노 연주를 마친 젊은 여성이 발코니로 나와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연주를 할 때 무엇을 느꼈냐고 묻는다. 젊은 여성은 뭘 느꼈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피아노 연주를 좋아해서 “Happy”했다고 답한다. 이리스는 원하는 답이 아니었는지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멜로디가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리스는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슨 감정이 들었느냐고 재차 묻고, 젊은 여성은 솔직히 원하는 만큼 잘 연주하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나아졌고 점점 나아지는 자신이 아주 조금 자랑스럽다고 덧붙인다. 이리스는 젊은 여성에게서 무언가 깊은 얘기를 끄집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어가 아닌 영어로 말하기 때문에, How are you?라고 물으면 척수 반사처럼 기분이 어떻든 간에 I’m fine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한국어가 모어인 사람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일까. 

 이리스는 볼펜과 인덱스카드를 꺼내 무언가를 불어로 쓰고 말하기 시작한다. 방금 젊은 여성이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시와 같은 구절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 와 같은 말을 불어로 쓰고 말한다. 한국어가 모어인 젊은 여성이 영어로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이걸 말하는 사람은 이리스인가 젊은 여성인가? 


 산책을 나선 두 사람은 커다란 기념비 같은 것을 발견한다. 젊은 여성은 저 돌에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말하고, 아버지가 가장 많은 기부금을 냈기에 이름이 새겨졌다고 덧붙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을 참 많이 아껴 주셨다고 말하던 젊은 여성은 갑자기 울기 시작하고, 이리스는 가방 속에서 무언갈 황급히 꺼낸다. 상대방의 눈물을 닦아줄 휴지가 아니라 볼펜과 인덱스카드다. 역시나 불어로 방금 젊은 여성이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른, 내가 바라볼 아버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같은 내용을 말하고 쓴다. 영어로 깊은 속내를 이야기하는 일에 조금 성공한 것일까? 번역이라고 해야 할지 창작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경계 위에서 의미가 멋대로 확장된다.  


 첫 번째 수업을 마치고 막걸리와 비빔밥을 알차게 먹은 이리스는 젊은 여성이 소개해 준 중년 여성 원주의 집으로 향한다. 이런 방식의 불어 수업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리스의 말에 원주는 “내가 기니피그가 되는 것이군요?”라고 질문한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수업 방식을 자신에게 실험하는 것이냐고 묻는 이 질문에 이리스는 당신에게 다른 목적은 없다고, 장기나 그런 걸 가져가는 흉악한 사람이 아님을 주장한다. 이처럼 미묘하게 미끄러지는 대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고, 서로에게 낯선 언어인 영어로 소통을 하면서 발생한다. 

 이 밖에 두 번째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은 앞선 수업과 대체로 비슷하다. 막걸리를 나눠 마시다가 원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리스와 해순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다시 돌아온 원주가 기타를 치고, 이리스가 기타를 치면서 무얼 느꼈느냐고 묻고, 역시나 해피하고 멜로디가 뷰티풀 하다고 느꼈으며 더 연주를 잘하지 못해서 아쉬웠다는 원주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번에도 원하는 만큼의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일은 수포로 돌아간 것 같다. 이리스는 영어로 돌아온 답변을 불어로 쓰고 말하며 이번에도 거의 창작을 해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에 대해. 


 막걸리를 잔뜩 마신 세 사람은 등산을 시작하고 윤동주의 시가 적힌 비석 앞에 멈춰 선다. 이리스는 해순의 도움으로 영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를 읽고, 어느새 원주는 앞선 수업의 흐름과 유사하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리스는 의미를 확장해서 또다시 불어로 시를 읊고 쓴다. 이리스는 영어로 말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불어로 시와 같은 말을 한다. 이리스를 통과한 말은 영어로, 또는 한국어가 모어인 화자가 한국어로 머릿속에 그렸을 말과 달라진다. 이리스는 외국어로 말하는 타인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아마도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발견하고 기록한다. 


 두 번의 수업을 마친 이리스는 낯선 한국 땅에서 자신이 머물 곳을 내어주는 인국의 집으로 간다. 이리스는 이제부터는 월세를 낼 수 있다며, 불어 수업을 해보라고 권유해 줘서 고맙다며 인국을 끌어안는다. 잠시 뒤, 인국의 어머니 란희가 갑작스럽게 인국의 집을 방문하고, 이리스는 어색하게 자리를 피한다.  

이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몇 번 방문했던 도서관으로 향한 이리스는 도서관이 문을 닫아서 망연자실하게 그 앞에 선다. 그런 이리스의 앞에 윤동주의 시는 다시금 나타난다. 늘 거기에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시를 발견한 것이다. 이리스는 우연히 만난 행인의 도움으로 역시나 영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를 읽고, 영어로 번역된 시를 다시 불어로 소리 내어 읽는다. 


 이 과정 속에서 언어는 한 겹도 아니고 두세 겹이 씌워지며 점점 화자가 직접 감각할 수 있는 세상과 조금씩 거리감이 생긴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불어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이리스의 불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한국어도 불어도 아닌 영어로 서로에게 말하고 듣는 인물들처럼. 한국과 프랑스의 배우가 영어로 하는 말을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을 보는 관객들처럼. 언어와 언어 사이를 횡단하고,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한 언어들 사이에서 길을 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 영화를 디아스포라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시인 윤동주는 디아스포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인이다. 서경석 작가의 저서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는 시인 윤동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동주의 시를 이해하려면 그때 윤동주가 살았던 그 시대성과 장소성이 아주 중요해요. 조선은 1910년부터 일본에 병합되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요. 그래도 그때 윤동주가 살던 간도는 식민지에 완전히 편입이 안 된 상태여서 상대적으로는 독립성이 있었습니다. 1932년 만주 사변 후에 일본의 직접 지배에 들어갔어요. 그로부터 10년 뒤 윤동주가 서울에 와서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시를 썼지요.
그때 왜 윤동주는 조선 말로 시를 썼을까요? 1910년부터 조선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문학자들은 일본 말로 글을 쓸 수 있었어요. 일본 말로 써야지만 발표도 할 수 있고 문학자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가 조선 말로 시를 쓰면서 저항한 이유는 일본 말을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선반도가 아니라 간도에서, 말하자면 민족주의적인 편견 속에서 살아온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조선 말을 사용하고 조선어로 글을 쓰고 서로를 사랑하고 싸우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이질 분자가 되었지요.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내가 되고 싶은 ‘나’

 한편, 낯선 이리스의 존재에 수상함을 느낀 란희는 인국에게 이득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며 인국이 이리스에게 뭔지, 이리스가 인국에게서 무슨 이득을 얻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타박한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리스는 한국에서 머물 곳이 필요해서 인국과 함께 지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인국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보아주는 것 때문에, 속세에서 도를 닦는 것 같은 맑은 영혼을 지녔고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서 살고자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인국 역시 이리스가 자신을 재능 있는 시인으로 보아주기에 이리스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이 아닐까. 인국과 이리스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서로에게 충족시켜주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들 속에서 발현되기에 나를 원하는 모습대로 보아주는 사람과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리스는, 아이리스가 아닌 이리스는, 근린공원에서 음정 박자가 어긋나게 피리를 불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이리스가 여행 중 만나고 불어 수업을 받았던 이들에게 투영한 감정과 시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괴로움은 이리스의 것이었을까? 그녀의 과거는 미스터리이기에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국은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집을 나선 이리스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찾아 나선다. 첫 만남과 마찬가지로 인국은 근린공원의 어딘가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누워 있는 이리스를 찾아낸다. “당신이 나를 찾아냈군요!”라고 말하는 이리스는 기뻐 보인다. 이리스에게 인국은 자신을 두 번이나 발견해 준 사람이자 자신의 의미를 발견해 준 사람이다.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지만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 줬으면 하는 마음 역시 외로운 여행자의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균열은 있다.


 이리스는 자신을 친구로서 좋아하느냐고 인국에게 묻고, 인국은 그렇다고 답한다. 이리스는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인국은 두 번이나 같은 대답을 한다. 이리스의 얼굴에 짧게 그늘이 진다. 이리스가 원하던 대답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두 사람은 두 사람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이 나의 집인가요?”라는 질문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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