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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철 Jan 16. 2021

이렇게 똥덩어리가 될 순 없지 않은가

vietato fumare

"그러나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약을 끊는 것은, 약에 의존하는 세포들이 죽고 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포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일이다."

-윌리암 버로스, 정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의 농도가 짙어졌다. 흡연을 위한 적절한 구실이 생겼다.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과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두드린다. 불광동 산동네에 위치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면 겨울에도 땀이 났다.

할머니가 다정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시면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노랗게 물든 벽지에 둘러싸여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어느 봄, 할아버지의 재떨이 속 장초를 빼돌려 사촌동생과 생애 첫 담배를 피웠고 할아버지 채취의 대부분은 담배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걸 국민학교 4학년인 나는 알게 되었다.


2년 후 친구들과 야산에 올라 나란히 앉아 88을 피웠다. 나와 다른 한 녀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담배에 불을 붙이는 방법 조차 몰랐다.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아무런 말 없이 연신 손가락을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영화 ‘비트’가 우리를 휩쓸었던 97년, 모두가 외출한 틈을 타 화장실 거울을 보며 몰래 훔친 아버지의 담배를 피웠다. 그 날 우리 집 화장실 안에는 나는 정우성이었고 정우성은 나였다.


이듬해 겨울 방학, 뿌연 두려움과 설렘이 가득 찬 마음으로 홀로 떠난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 내 옆좌석의 일본인 골초 2명은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댔다.

3주간의 프랑스 체류는 외롭고 추웠다. 유럽에도 혹독한 겨울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어리고 멍청한 나는 두꺼운 외투를 챙기지 않았다. 눈 내린 프랑스의 길을 걷고 빨간색 말보로를 피우며 형언할 수 없는 자유와 시원한 해방의 맛을 느꼈다.  

수능을 치르고 자유와 희망의 바람을 맞으며 신촌 거리를 쏘다니던 내 바지 주머니 속엔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술집에서 커피숍에서 보행흡연까지도 가능했던 그때는 흡연가들의 호시절이었다. 정점에 있는 것은 하향길을 목전에 둔다.


신병교육대, 4주 차가 되던 어느 날 저녁, 동갑내기 조교는 훈련병이던 나를 소각장으로 불러 말보로를 건넸다.

‘야, 강인철. 신교대 나가면 친구 먹자.’

‘네! 알겠습니다.’

호의를 베푼 그 조교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절망하던 훈련병은 친구가 되지 않았다.


훈련병 생활이 끝나고 2년 동안 북한의 민둥산이 코 앞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일본어 통역, 안내병으로 군생활을 했다. ‘겨울연가’의 욘사마가 가공할만한 인기를 떨치고 있던 터라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고 그들 중 몇몇은 일제 담배를 선물하곤 했다.

난 그 일제 담배를 취사장 아저씨에게 가져다주었고 그는 설탕 뿌린 튀긴 건빵, 계란 프라이, 간부들을 위한 튀긴 햄버거 패티 등으로 갚아 주었다.

제대 후에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편의성에서 2006년 이탈리아는 2006년의 한국과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다. 24시간 편의점은커녕 주말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당시 유로 환율이 너무 올라있던 터라 담배 한 갑을 사려면 5000원에서 6000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 선택할 수 있는 건 말아 피우는 담배였다. 책상에 앉아 밤마다 다음날 피울 담배를 말았다. 귀찮지만 별 수 없었다. 3년간의 이탈리아 유학생활을 끝내고 스페인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담배를 끊었다. 2014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흡연을 시작했고, 약 2년 전쯤 금연을 선언 후 담배는 다시 건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건강을 생각해 1mg으로.


1분당 평균 호흡수를 20회라고 가정하면 나는 39년간 대략 4억 9백9십6만 8천 번 숨을 쉬었다.

그중 담배연기는 몇 번의 숨속에 내 몸속을 오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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