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오공사 #2
<아빠가방에들어가신다.> 이 문장을 모르는 90년대생은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초등학교에서 띄어쓰기의 중요성을 알려줄 때에 제일 처음 배웠던 문장. 비슷한 맥락의 뜬금없는 기억으로는 근의 공식, 조선왕조계보, 원소 주기율표 20번까지 등이 있다. 정말 어이없지만 아직도 이걸 기억하나 싶은 기억들....
우리는 어떻게 띄어쓰기에 익숙해지는 걸까? 작가는 어린 시절 받아쓰기를 하면 100점을 맞아본 적이 없던,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참 취약한 미취학 아동이었다. 왜 그렇게 띄어야 하는 말이 많은지. 왜 틀린 문제는 10번씩 써야만 하는지 등의 불만이 가득했던 아이였다. 점점 글을 많이 쓰게 되면서도, 마지막 점검을 하고 맞춤법 검사하기를 돌릴 때면 살짝 시험 채점하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아직까지 띄어쓰기를 틀릴 때가 꽤 많다. 화면에 빨간색 점선이 그어진 단어가 많아지는 날엔 괜히 머쓱해지기도 했다.
사람 간의 관계 또한 띄어쓰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어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말이다. 가끔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 자신과 깊은 마음속에 있는 자아 사이에도 느껴지는 게 거리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정답이 있는 문장의 띄어쓰기보다는 인간관계의 띄어쓰기가 더욱 어렵다. 때론 내가 상대방에게 너무 들러붙어있는 거머리가 된 것 같아 밤에 이불을 걷어차게 되는 날도 있고, 혹은 누군가와의 거리를 지구와 달만큼 띄어버리고 싶어지는 때도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띄어 쓰고 싶은 존재였을 것이다. 혹은 너무 붙여 쓰고 싶은데, 문법의 벽에 가로막힌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처럼 다가올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다만 우리 사이의 거리가 글쓰기와 다른 점은 정답도, 정답을 알려줄 선생님도 없다는 것. 그깟 벽쯤은 허물어줄 수 있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글로 치면 관용적 표현을 무한대로 만들고 끼워 써도 가능한 게 우리 인생이다. 이 답도 없는 인간관계의 띄어쓰기에서 우린 스스로만의 기준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알아지는 나만 아는 기준.
예를 들면 청소년기에는 학교라는 정글 안에서 처음 보는 친구와 친해져 보려 노력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노력이라도 분명 그때는 큰 용기를 냈고, 떨렸을 것이다. 또한 성향이 맞지 않는 급우와 친해지려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어른이 될수록 줄어들고, 점점 마음이 맞거나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들과의 거리만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띄어쓰기 법칙을 만들어 가고 삶에 대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띄어쓰기 법칙은 아마 삶을 살아가는 동안은 매우 변덕스럽게 바뀌겠지.
나는 아직도 띄어쓰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