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5월 나는 엄마 뱃속에서의 10개월 셋방살이를 끝내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날이 나라고 말하는 내가 처음 시작이 된 날이다. 나는 쌍꺼풀 진 큰 눈, 까만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나를 본 간호사들은 아빠가 흑인이냐는 황당스러운 질문을 했다고 한다. 뭐 혼혈은 이쁜 아이라는 뜻이니 기분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 보려고 한다.
나에겐 5살 차이가 나는 오빠가 있다.
오빠는 자유분방한 남자아이였다. 사람들의 심장이 철렁하게 만드는 천방지축. 위험천만하게 쌩쌩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매일같이 온 동네 친구들을 끌고 잠자리나 매미를 잡으러 다녔다.
그런 오빠와는 다르게 나는 말이 없고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아이 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일하시느라 바쁜 엄마 곁에만 붙어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엄마에게 붙어있었던 건지, 소극적인 나를 위해 엄마가 내 옆에 있어 주었던 건지...
엄마가 매일 바빴던 이유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엄마는 미움받는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엄마가 미움을 받았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결혼 날을 잡아두시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친할머니는 고아가 된 며느리를 미워하셨고, 좋은 일을 앞두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엄마는 시댁 식구들에게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아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했다.
엄마 아빠도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되었다.
결혼 초 어린 아빠는 친구가 좋아 밖으로 돌았으며 어린 엄마를 보듬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의 아빠는 무서운 커다란 호랑이 같았다. 가난이 그렇게 만든 것이 었을까?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빠는 때가 되면 화가 나 계셨고 호랑이가 나타날 때면 나는 호랑이를 물리쳐 보려 하지도 않았으며 호랑이를 피해 오빠와 방구석에서 눈과 귀를 막고 숨어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엄마는 매일 아파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오빠와 나를 위해 힘든 일 마다하지 않으시며 악착같이 버셨고 우리의 기를 살려주려 했기에 매일이 바빴던 것이 맞는 거 같다. 매일 호랑이가 나타날까 겁에 떨던 날들도 익숙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의 성격도 점점 변해갔다.
가난이 싫었나 보다. 항상 돈에 목매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에게 관심받고 싶었지만 난 조용히 아무런 소리 없이 기다려왔다. 시간이 갈수록 두 분은 더욱 바빠졌다. 자연스레 나를 챙길 여유도 없어졌다. 결국 나는 엄마와 친한 분의 집이자 내 친구의 집인 곳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다.
유치원이 끝나고 친구와 신나게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 놀이는 재미가 없어지고 우리 엄마 언제 오나 엄마랑 밥 먹고 싶은데 라는 생각으로 엄마를 기다려 왔다.
그때부터 나는 외로워 던 것일까? 분명 엄마는 내게 못 해준 게 없는데.... 그저 오빠와 나를 지켜주려는 강한 엄마의 역할을 맡은 것인데.... 그것이 엄마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말이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지만 마음은 이해를 못 했는지 매일 외로웠다.
느리게 가던 시간은 날 위로해 줄 생각도 없었는지 잘만 흘러갔다. 시간은 흘러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입학식 날이다. 6학년이었던 우리 오빠는 자신의 6층 교실 창문에서 몸이 반쯤은 튀어나와서는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오빠가 창문에서 떨어질까라는 걱정은 하지 않고 나를 반겨줘서 너무 행복했다. 입학식 날 엄마 아빠가 안 오신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위험천만하게 흔들어준 우리 오빠의 작은 손뿐이다.
입학 후에도 달라진 건 많이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엄마가 더 많이 강해졌고 더 바빠지셨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여전히 바쁜 엄마를 뒤로한 채 엄마가 차려놓은 간식들을 먹고 가만히 엄마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상이 차려지기 때문이었던 거 같다. 나는 그 저녁상이 참 좋았다. 생각해 보면 뭐라도 하면서 엄마를 기다릴 걸 왜 나는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나 싶기도 하다. 기다리는 것이 지겨울 법도 한데 나는 익숙해져 갔다.
1년 2년 여러 해가 흘러갔다..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점점 좋아져 갔다.
그러다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노력에 보상을 받듯이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새로 들어가게 된 학교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하는 학교생활이 너무나 즐거웠다. 때 되면 공부하고 공부 다 하면 친구들과 놀고 집에 오면... 잠을 잤나? 언제나 난 친구들과 함께였다.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점점 좋아지고 있었기에 더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려 하셨다.
그런데 나의 바람은 부유함이 아니었다. 행복한 엄마 아빠와 따뜻한 온기였다. 나의 바람은 그저 내 바람일 뿐. 엄마와 아빠는 매일이 바빠서였을까? 언제 으르렁대실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고, 매일 바쁘신 모습을 보는 나는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아니다 그냥 나라도 조용해야 모든 게 다 지켜질 거 같았다. 그냥 이대로가 좋은 걸까? 바라는 게 있었을까? 왜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을까? 에 대해 생각해보니...
무언가를 안 해주신 것도 없다. 다 가질 수 있게 해 주셨다. 아쉬운 거 없게 해 주셨다. 그런데 나는 비가 오면 우산을 가져다주고 대문을 열면 어서 와~라고 말해주며, 투정 부리면 그랬구나 하며 나를 토닥여주는 엄마를 바랐던 거 같다. 학창 시절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 그냥 매일 혼자 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내가 뭘 원하는지... 아마 돈이 아닌 내 곁에 있어주는 엄마는 큰 욕심이라고 생각했기에 내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하는 게 정답인 거 같다.
뭐든 사랑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상황속에서 엄마의 판단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기에 나는 그 판단을 이해하려 한다.
그때부터였다. 난 엄마가 된다면 부유함을 안겨주는 역할이 아닌. 마음을 나누어 주는 역할을 맡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아이들 곁에서 따뜻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