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어느 날, 한 기사에서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라는 제목의 글을 읽다가 아차 싶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건강한 식단으로 먹는다는 생각에 이미 냉장고에 식재료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또 장을 보고, 있는지도 모를 식재료는 신선함을 잃어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향하는 날이 많았다.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냉동실을 열어보자.
검은 비닐봉지가 정체 모를 고기와 함께 붙어 얼어 있는 덩어리를 몇 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심각한 것은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매머드 고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냉동실에는 냉동만두가 더 냉동되어 방치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이다. 보통 이런 돌 만두는 새로운 냉동만두를 넣으려다가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으로 냉장실을 열어보라.
공장에서 오래 보관해서 먹으라고 플라스틱에 담아 포장한 식품들로 가득할 것이다. 플라스틱에 담긴 생수병과 음료수, 병에 단긴 여러 저장식품들. 냉장실에 잘 보관하면 유통기한 정도는 하루 이틀 거뜬히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유통기한은 실온을 기준으로 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호박마저도 진공포장으로 채소 칸에 들어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냉동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대형마트에서 사 온 제품들 뒤편에 정체 모를 플라스틱들과 비닐봉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중에서
사실 매일매일 마주하는 음식에 대해서 영양적인 걸 생각하거나 궁합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설날에 받은 냉동만두는 방치되어 있다가 추석에 한 번 더 냉동만두를 받으면 그때서야 확인한 적도 많다. 친정에서 보내주신 잘 말린 생선이 몇 달 전건지 알 수 없고, 욕심부려 구매한 베이글과 수제쿠키, 식빵은 양이 많아서 소분하여 냉동실로 향한다.
처음부터 먹을 만큼만 구매하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 텐데 왜 자꾸 욕심부려 많은 식재료를 구매하는 것일까?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당장 먹지도 못할 식재료를 구매한 후 냉동실로 향한다.
신랑과 나 둘만 먹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지만,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러 가면 항상 많은 양의 식재료를 담게 된다.
부끄럽지만, 일 년 전 난 한 끼니에 이 많은 양을 혼자 다 먹었다. 배가 불러도 먹고, 음식 남기는 게 아까워 소화를 못 시키고 헛구역질을 해서 위가 고장이 나고, 결국 만성위염과 식도염까지 얻었다.
이렇게 먹으면서 너무 잘 먹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아침을 거르고, 회사 급식을 먹고, 2시간을 걸려 집으로 도착하면 거대한 저녁식사로 내 위가 부담스러워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고기가 가득한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한 나의 육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저절로 감겨 설거지도 못한 채 침대로 향한다.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한 나의 위장은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지만, 모른척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반복적인 삶을 지내왔던 것이다. 만성 위염이 생기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고, 피곤함이 누적되어 사회생활에서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감정적으로도 힘들게 된다. 그러면서 또 음식으로 풀게 되는 게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 같은 인생이라고만 생각했다.
늘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잦은 외식과 배달음식은 나에게 음식중독을 가져다주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음식을 멀리할수록 먹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 채워졌다는 게 부끄럽고, 성인이 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꼬르륵 소리를 들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 정도였다.
식사를 하고, 생각 없이 입 안으로 들어갔던 간식들로 인해 내 몸에게 폭행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까지 들었다.
지나고 보니 음식중독은 정제 탄수화물을 과다 섭취할 경우 생기는 현상인데, 그러면서 우울감도 같이 찾아왔던 것 같다. '운동'을 왜 해야 되는지, '식습관'을 왜 바꿔야 하는지 식단을 하면서 느끼기 시작했다.
꼬르륵 신호로 시작되는 아침 먹는 습관, 접시에 올라오는 식재료를 바꾸는 행동, 사소하지만, 꾸준하게 반복하는 나의 삶이 변하기 시작하고,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위해 많은 식재료를 구입하는 것보다 먹을 만큼만 자주 구매하기로 했다.
평일에 깨끗하게 먹고 나면, 주말엔 맛있는 음식으로 보상해주고, 와인도 한 잔 한다. 전에 느끼지 못한 맛의 풍미, 행복 호르몬이 생겨난다.
일 년 동안 서서히 신체, 호르몬, 감정이 변하는 게 신기하고, 사람이 변할 수도 있구나!
자연이 주는 제철 음식으로 도시락 싸다가 음식의 재료들이 내 손 앞에 편하게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