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여행길을 걷게 된 지 어언 며칠이 지난 사랑하는 친구들과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함께 하면 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며 럭키 4라는 자체 별명까지 만들어 놓은 상태다. 사실 대장정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런 식의 연속적 행운은 처음 경험한 것이었는데, 살다 보니 좋아하는 사람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니다 보면 좋은 기운과 열망이 모여 생각지도 못한 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튼 이 멤버들은 나의 여행 운을 처음 열어준 예쁜 장본인들이다.
낯선 곳으로 혼자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루트로 가고, 숙소는 어디로 연락하고, 그 지역에 가면 무얼 보고 즐겨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사전 조사를 하고 집을 나서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나는, 생각해 보면 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하긴, 이탈리아에만 머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게 되고, 또 루트도 완전히 변경하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스트리아 하면 빈과 잘츠부르크, 그리고 음악가들이 거쳐 간 도시 몇 군데 정도의 이름을 기억할 뿐인 내게, 할슈타트라는 곳은 완전히 낯선 지명이었다. 나름 잘츠부르크의 근교지만, 들어가려면 교통편이 그다지 좋지 않아 왕복 몇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일행 한 명이 간곡히 원하는 걸 보니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지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미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 되어 있기도 하므로.
버스와 지역 기차, 그리고 배까지 타야 하는 경로를 거쳐 두 시간 여 만에 할슈타트에 도착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동하는 중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 자체로 지상낙원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잘츠부르크 역시 자연과 함께 하는 작은 도시이지만, 그곳은 한창 세계적인 여름 음악축제로 붐비는 가운데, 이곳 할슈타트는 그와 비할 수 없이 작은 동화 속 마을 같은 모습이다. 마침 촉촉하게 비가 내려 한 여름임에도 쌀쌀함을 느낄 정도인데, 그게 오히려 자연 속에 푹 담겨 있다는 걸 실감케 하는 청량감을 준다.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운무가 걸린 다흐슈타인 산과 이에 둘러싸인 푸른 호수,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스트리아식의 소박하면서도 예쁜 집들은 도저히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약간은 신령스러운 분위기 속 호수를 바라보는데, 그 잔잔한 물결이 내 맘에도 딱 그만큼의 파동을 준다. 예전 오스트리아에 살던 지인들은 주로 호숫가로 여름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고, 역사에 등장한 내가 아는 이 지역 명사들의 휴식 공간 역시 전부 호수 근처였다. 또, 이쪽 지역에서 나온 예술가곡 중 유독 호수를 노래한 작품들이 많은데, 이제 왜 그런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다. 그래서일까? 분명 처음 보는 풍경인데, 그렇기에 더 놀랍고 아름다운데, 한편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오는 그 느낌이 놀랍다. 아마도 오랜만에 어느 지역에서 나와 비슷한 맥박과 체온을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곳을 몰랐던 무지한 나를 데리고 와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우리는 살짝 흩뿌리는 비 사이로 사이좋게 우산을 쓰고 평화로운 동네를 걸어 다녀 보았다. 날씨 때문인지,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욱 좋다. 유난히 좁은 골목길이 작은 동네에 온 걸 알려주듯 더욱 친근하다. 시골에 왔으니 이 지역에서 만든 특산품 상점에 들어가 볼까. 목공예를 하는 곳에서는 킁킁거리며 이곳 나무의 향기로운 냄새와 귀여운 공예품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서는 유난히 꽃문양이 많은 장식품들을 바라보며 이 모든 걸 다 좋아하실 엄마 생각이 많이 나기도 한다. 집으로 다 데리고 가고 싶지만 짐을 늘릴 수 없는 가난한 여행객의 사정이 아쉬울 뿐.
하나 이내 정육점에 들어가 그 집에서 직접 만든 브랏부르스트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자니 그저 부자가 된 기분이다. 어찌나 고소하고 신선한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상점 안에는 작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 거기에 앉아 오순도순 먹는데, 이곳 어느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주신 간단한 식사를 대접받는 느낌이다. 이런 게 시골 여행의 편안한 묘미 아니겠는가.
밥을 먹었으니 이제 힘을 내어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소금광산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잘츠부르크라는 이름 첫머리의 ‘잘츠’가 바로 소금을 뜻하는 독일어이고, 할슈타트의 이름 첫머리인 ‘할’ 역시 고대 켈트어로 소금을 뜻한다. 그만큼 오스트리아 서부는 소금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고, 특히 이곳 할슈타트는 고대로부터 소금이 발견되어 세계 최초로 소금광산이 생긴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아, 그렇구나. 이곳은 ‘빛과 소금’의 그 소금과도 같은 마을이었어. 그러니 절대로 작은 마을이 아니지.
아무튼 편리한 시설 덕분에 직접 산을 타지 않고도 이렇게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어 참 감사하다. 푸니쿨라에 탑승하니 유리창에 빗물이 송골송골 맺혀, 물안개 자욱하게 낀 호수와 마을의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그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감동적 모습이 잊힐까 봐 이 순간만큼은 말없이 그 풍경에 집중한다.
종착지에 올라가니 소금 관련 제품이 가득한 기념품 상점이 먼저 눈에 띈다. 사실 소금광산을 제대로 돌라면 몇 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이날은 비가 많이 오기도 했고, 우리도 당일로 움직여야 하는 관계로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이 상점을 구경하며 기념품을 구입한 후, 바깥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나름 산 중턱에 올라온 것인데, 그 모습은 아랫동네에서와는 또 다른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산이 주는 맑은 기운에 그동안의 여독이 싹 씻겨 내려가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을 바라보며, 이런 곳에 사는 분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 본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마을은 조상 대대로 지켜지고, 가꾸어지는 곳일 테다. 마치 이 산의 나무들처럼, 이곳의 일부로 지내며 바깥세상의 속도는 중요치 않은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그런 자연적이고 느리고 순수한 삶이 너무나도 부럽고 대단해 보인다.
한껏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산을 내려왔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별 말없이, 하염없이 산책하기만 해도 너무나 좋은 이 마을을 돌아 내려가는 우리의 얼굴은 잠을 거의 못 자고 새벽같이 숙소를 나섰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투명해진 서로의 얼굴빛을 느끼며, 촉촉한 자연이란, 오랜 역사를 품은 마을이 주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운이란 이런 것이구나 새삼 실감한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지.
오랜 세월 든든히 이 마을을 지키며 바다를 흔들어 호수와 마을을 만들고 세상에 소금을 선사한 그분께 기도한다. 이곳 산 중턱 어딘가에 두고 온 내 마음을 다른 계절에 다시 한번 꼭 만나게 해 달라고.
잔잔한 파도의 은빛을 따라 춤추듯 흐르는 저 작은 배, 아 기쁨에 싸인 나의 마음도 작은 배 따라서 흘러가네. 붉은 저 석양도 물결에 맞춰 작은 배 위에서 춤을 추네...(가사로 쓰인 슈톨베르크 백작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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