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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l 05. 2021

사람에 남긴 마음, 뮌헨


어느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어찌 보면 운명이다. 우리는 행선지와 일정을 미리 계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정확히 일어날지 계획할 수는 없다.


그 해의 뮌헨행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즉흥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독일로 넘어갈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나 그날 내가 뮌헨행 열차를 타지 않았다면, 삶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의 삶의 타임라인에서 교차하지 못했을 것이고, 뮌헨에 대한 기억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 사건들과 운명처럼 엮이는 행복을 여행길에서 진하게 경험한 것은 이후 삶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 때때로 찾아오는 두려움을 걷어내는 힘, 그리고 너무 많은 걸 미리 계획하기보다는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고자 하는 지혜로 돌아왔다.


원래는 이탈리아에서 바로 프랑스로 넘어가려고 했었다. 니스를 거쳐, 파리로 넘어가려는 게 친구와 나의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한국 사람을 마주치게 될 줄 전혀 생각지 못한 친퀘 테레에서 만나게 된 나 홀로 여행객은 우리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부터 홀로 여행을 시작해서 이탈리아 전역을 거쳐 우리를 만난 그는 이미 이 여행에 많이 지쳐 있었기에 더는 혼자 있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역에서 프랑스행 밤기차를 알아보는 우리가 발권에 부디 성공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실 여름 극성수기에 프랑스행 밤기차를 당일에 예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했다. 그래도 프랑스로 꼭 가야만 했다면, 우리에겐 유레일패스가 있으니 친퀘 테레에서 하이킹을 하며 하루 이틀 더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리라. 길에서 만난 여행객의 다음 행선지인 뮌헨으로 동행하게 된 건, 그만큼 이 귀여운 동생을 지켜주고픈 마음도 한몫했다.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소년 같은 승무원의 친절함을 잊을 수 없다. 이탈리아에서 험한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곤란한 상황을 더러 겪기도 한 우리들이었기에, 그의 성실한 미소만으로 열차 침대칸의 불편함을 이길 수 있었다. 뮌헨 역에 내린 첫 순간 역시 감동이었다. 그렇게 탁 트이고 깔끔하고 시원한 역사라니! 뒤돌아보면 이탈리아 역사의 열기와 시끌벅적함도 큰 추억이지만, 독일에 첫 발을 내디딘 후 늘 주위를 살피고 조심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낀 것은 낯선 곳을 탐험해야 하는 여행객에게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된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역 근처 유스호스텔을 찾기로 했다. 그때 또 다른 나 홀로 여행객이 말을 걸어온다. 숙소를 찾고 있는데 혹시 어디서 묵으시냐며. 국내의 역사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젊은이를 만났다면 조금 의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지에서는 낯섦이 역력한 서로에게 이상하게 자동 무장해제가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젊은이까지 끌고 유스호스텔에 도착하여 짐을 맡겼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아직 방을 잡을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넷이 함께 뮌헨의 중심인 마리엔 광장의 신시청사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다른  홀로 여행객이 길을 묻는다. 허허, 우리한테 자석이라도 붙었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역시 우리 일행에 슬쩍 합류한다.


우리 다섯은 마치 원래 잘 알던 사람들처럼 왁자지껄하며 신시청사 앞 다른 관광객 사이에 묻혀 정각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시청사의 외벽 자체를 바라보니, 한 구석 한 구석 정교하게 디자인된 멋진 건물이다. 시간이 되니 인형들이 글로켄슈필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아 나오는 것을 목이 꺾여라 관람했다. 인형도 독일답게 정교하고 소리도 영롱하지만, 사실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닐 수도, 별거라면 별거일 수도 있는 자태다. 암튼 그곳에 꼭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은, 시청사 앞 글로켄슈필을 보고 듣는 일이란 어찌 보면 뮌헨에 왔다는 일종의 신고식 같기도 하기에.



뮌헨 관광객으로서의 상징적 관람을 마친 후, 일행과 함께 시청사 첨탑 전망대에 함께 올라갔다. 역시 어느 도시에 가던 탁 트인 전망을 한 번 봐주면 그 지역의 모습을 한눈에 넣을 수 있어 좋다. 지금은 이렇게 정겹고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뮌헨 역시 전쟁이 할퀴고 간 흔적이 역력한 곳이다. 무너진 것들을 재건하며 되도록 과거의 모습을 지키고자 한 이 도시의 선택은, 바이에른 사람들의 전통에 대한 귀한 자존심을 다시금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시청사 전망대에서 내려온 후 우리는 길에서 독일식 소시지인 브랏부르스트를 사서 간단한 점심을 함께 했다. 나와 내 친구는 음악인, 한 친구는 치대생, 다른 친구는 건축학도, 막내는 교회 전도사님이다. 밥을 나누며 쌓이는 정이라던가. 그동안 살아온 스토리를 짧게 나누고, 또 여행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이런 얘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데,  순수한 착함이 그들의 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처음 유럽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한 나라에 집중하여 여행을 하게 될 줄 알았고, 게다가 나 역시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한 것이었는데, 어느덧 나도 모르게 여행의 색깔이 바뀌어 친구가, 그리고 낯선 여행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궤를 다르게 하고 있다. 이전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과,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식사 후 이번엔 레지덴츠 궁으로 향했다. 도시를 대표하는 궁인데도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어 거의 우리들끼리 관람하는 것 같은 고요함이 평안함으로 다가온다. 금빛으로 치장된 화려하면서도 고상함을 놓치지 않는 바이에른의 궁과 보물들을 뒤로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이 더 큰 우리는 서로를 찍기 바빴다. 홀로 하는 여행도 좋지만, 아름다움을 실시간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에 때로는 외롭기도 하다. 사람의 눈빛과 체온을, 좋은 마음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모여, 다 같이 만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음에도 정이 쏙쏙 쌓이는 걸 자연스레 느낀다.



여행 이상으로 자신을 속속들이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며 공부하고 수다 떨던 친구였지만, 이전엔 몰랐다. 내가 그를 얼마나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는지. 또, 여행만큼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하염없이 마음이 열릴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이전엔 몰랐다. 그저 길에서 만났을 뿐인 사람들과도 열흘 밤낮의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면 십 년을 알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우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걸. 그게 여행이란 틀 없는 일상이 주는 마력이란 것을.


이날의 기억 중의 절정은 단연코 호프브로이에서 함께 한 저녁시간이다. 평소 맥주를 즐기지는 않는 편이지만 이날만큼은 그 맛에 대한 감탄이 이어졌다. 여전히 궁금하다. 그 맛의 비결이 뮌헨의 실력인지, 아니면 분위기 탓인지. 독일 전통의 흥겨운 민속 음악 연주를 배경으로 짭조름하게 맛있는 음식과 왁자지껄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막내는 머무르는 숙소가 달라 아쉽게도 저녁식사 이후 헤어졌지만, 나머지 친구들과는 흥겨운 마음을 안고 숙소로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뮌헨 역에서 만난 친구 역시 숙소는 같으나 머무르는 방도, 다음날 행선지도 달라, 그날 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 마련되어 있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어젯밤 자기 방으로 돌아간 친구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어제 하루를 온전히 함께 했음에도 갑자기 서먹한 기운이 돈 건 잠시, 숙소에서 나와 영국정원으로 향하는 길에 그와 또 동선이 겹치게 된다. 넓고 정결한 영국정원에서 함께 어린아이처럼 뛰놀며 사진 찍기 바빴던 우리. 결국 이 친구, 독일 북부로 올라가려던 방향을 즉흥적으로 틀어 우리 일행이 계획하고 있던 잘츠부르크행에 합류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10여 일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여행을 했다. 몇 년 후 나는 독일에 일정이 생겨 뮌헨에 홀로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처음 방문 때 들르지 못한 아름다운 님펜부르크 궁전과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가득한 알테 피나코테크와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 등을 다 돌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이곳을 들른 마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뮌헨에서 내 마음이 담긴 자리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인 게 틀림없다.  


https://youtu.be/mDfVbF1UTGc

뮌헨 출신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부인에게 결혼선물로 헌정한 가곡 <내일(Morgen)>.


그리고 내일 태양은 다시 빛날 거에요
또한 내가 걸어갈 그 길 위에서
우리들은 다시금 하나가 되어 행복할 거에요
태양을 들이쉬고 있는 이 땅에서...
그리고 푸른 물결이 넘치는 드넓은 해변으로
우리는 조용하고 느리게 내려갈 거에요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아야 해요
그러면 우리에게 고요한 행복의 정적이 도달할 거에요.

by John Henry Mackay(미르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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