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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l 08. 2021

추억이 봉인된 자리, 프라하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여행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여행 전 준비하는 시간에 있다고. 수년 동안 이곳저곳을 여행하게 되면서 여행 전의 기대와 여행 후의 실체는 사뭇 다른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여행 전 환상이 가장 크게 자리한 프라하는, 직접 갔을 때 기대 이상으로 더욱 큰 아름다움을 발견한 곳이다.


우리 일행은 오스트리아 빈의 서역에서 출발해서 프라하 중앙역에 자정에 도착했다, 한 친구를 잃어버린 채 나머지 세 명만 프라하로 도착할 뻔한 위기도 있었으나, 그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한 우리가 탄 기차를 바람같은 속도로 달려와 극적으로 잡아타게 되므로 무사히 함께 당도하게 된 것이다. 지친 몸으로 밤늦게 숙소에 도착하니 그 어느 지역에서보다 좋은 시설에 편안한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어 큰 안도감을 느낀다. 이곳에는 일주일 이상 계획 없이 머무르는 이들도 꽤 있었다. 오랜 배낭여행으로 지치고 힘든 와중에 프라하에 오니, 타 지역보다 저렴한 물가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어 아예 이곳 일정을 늘려 잘 먹고 쉬고 가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었다.


숙소에서 오랜만에 꿀잠을 자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 밖을 나섰으나, 실은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열흘 정도 함께 여행하며 가족이 다 된 이들과 이곳에서 남은 여정 각자의 갈 길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날이 여행의 마지막 날인 친구도 있었기에, 오전에는 일행들과 잠깐 흩어져서 각자 필요한 목적지를 먼저 방문한 후, 낮 시간에 구시가지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와 일행 한 명은 그 사이 국립박물관을 잠깐 들르게 되었는데, 사실 그 전시 내용은 서유럽 국가들의 것보다 알차지는 못하다. 다만 체코에 와서 처음 제대로 들어간 건물의 고풍스러운 미에 놀라고, 건물 테라스에서 바츨라프 광장의 복작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새로운 장소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을 한껏 흡수해 보기도 했다.


이제 약속 장소인 구시가지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았다. 가는 길에 만난 화약탑이 바로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중세에 지어진 디자인 자체가 이 문을 통과하면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을 할 것만 같은 오라를 풍긴다. 드디어 구시가지 광장에 도착하니 아침부터 꽉 껴 있던 구름이 순간적으로 걷히며, 이곳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틴 성당의 쌍둥이 첨탑이 파란 하늘 아래 동화 같은 모습으로 반짝거리며 등장한다. 아, 이 광장에 실제로 서 있는 것 자체가 두근거림이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장소에 도착한 것 같은 설렘이라고나 할까.



프라하는 예쁘고, 그건 상상 이상이다. 건물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색과 디자인이 분명하고 세월이 그대로 묻어 있는 고풍스러움을 뽐낸다. 이곳 구시가지는 내가 역사의 어느 한 점으로, 그것도 아무런 아픔이 없는 가장 멋진 순간으로 회귀하여 서 있는 것 같은 마음을 선물해 준다. 내게는 하염없이 단내 나는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피해 갈 수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일 거라는 걸 떠올리니,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근처의 여러 예쁜 상점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특히 프라하는 마리오네트 인형극으로도 유명해서인지, 이미 연기력을 갖춘 오색빛깔 인형들로 가득한 상점들이 꽤 유혹적인 손짓을 한다.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살았던 빈보다도 그의 음악을 더욱 사랑하여, 오페라 <돈 조반니>를 초연한 도시로 역사에 남아 있다. 빈에서도 다 이해 받지 못했던 모차르트의 극음악을 이들은 포용할 만큼 탁월한 예술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리오네트로 축약한 버전의 <돈 조반니>를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더욱 이 인형들에 관심이 쏠린다.



운치 있는 하늘 아래로 근처의 여러 멋진 건물들과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걷다 보니, 드디어 프라하의 젖줄, 블타바 강에 다다랐다. 어느 도시던 그를 관통하는 강과 그 위에 얹어진 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 너머로는 프라하 성이 우리를 내려다보듯 기품 있는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앞에 놓인 멋진 카를교는 프라하 성이 우리를 위해 깔아준 초대장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https://youtu.be/3G4NKzmfC-Q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 몰다우가 바로 블타바 강의 독일식 이름이다.


이날은 카를교 너머를 탐색할 계획은 없었지만, 보행만 가능해서 더 좋은 이 기품 있는 다리를 넘나들어 보니, 마치 이 도시를 이미 다 누린 것 같은 풍요로운 마음이 든다. 특히 강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지켰을 예수님과 성인들의 성상을 바라보니, 숙연해지기도, 든든해지기도 한다. 이 다리 위에서는 이 도시 사람이던 객이던, 또 그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똑같은 바람을 맞으며 차별 없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한 친구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아쉬운 마음을 안고 구시가를 맴돌다 보니 어느덧 구름 사이로 해가 뉘엿뉘엿 떨어진다. 우리는 적당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은 후 다시 강가로 나왔다. 그사이 다리 위와 건물들의 조명이 켜지며 낭만의 색을 한층 더 입는 와중에, 프라하 성 역시 외벽을 밝히는 조명으로 또 다른 주목을 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멋진 야경에 마음은 한층 더 시큰해진다.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누린 이 시간의 의미와, 헤어짐을 앞에 두고 먹먹한 우리를 위로하는 그 마음이 이 정경에 다 담겨있는 것만 같다.



아쉬운 맘으로 밤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친구를 배웅해 주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한 후 맞은 다음 날, 남은 우리는 이가 하나 빠진 듯 약간은 어색한 상태에서 또 다른 하루의 여정을 맞았다. 이날은 전날 카를교 너머 우러러보기만 했던 프라하 성을 방문하기로 했다. 입구의 근엄한 위병 교대식도 보고, 정갈한 왕궁 정원을 조금 거닐다 성 비투스 대성당 방향으로 올라가니 어제와는 또 다른 반짝이는 햇살 아래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를 맞는다. 그러자 조금은 어색했던 기운이 풀리며 새로운 오늘을 잘 보내자는 희망이 샘솟는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비투스 대성당에 발을 들여놓자 !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하늘로 닿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 이보다  높을  있을까? 고딕의 천장은 아무리 목을 뒤로 꺾어도 눈길이 쉬이 닫지 않을 높이에 있고, 어둑한 실내의 공기를 구석구석 잠재우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사방에서 하나하나 황홀한 디자인과 화려한 조합의 영롱한 빛을 뿜으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으로  느낌을 온전히 담기는 불가능하단  알면서도 셔터를 누르다 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다. 온전히 압도당한 상태에서 성당 전망대로 올라가니, 붉은 지붕들 너머로 보이는 구불거리는 블타바강의 시원한 정경이  도시의 존재감을 다시금 일깨운다.





대성당에서 나와 구왕궁으로 들어가 중앙 홀의 세련된 궁륭에 감탄하고, 마지막으로 대성당보다 더 오래된, 천 년 넘은 성 이르지 성당에 들어가 대성당에서 다 하지 못한 기도를 올린다. 고딕보다는 따뜻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이 로마네스크 성당 안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여정을 허락하심과, 함께 한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멋진 앞날을 축복해 주시기를.



성을 나와 울긋불긋 아기자기한 황금소로를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천천히 따라 내려갔다. 성의 소소한 역사를 지닌 이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함께하는 여정을 서서히 마음속으로 정리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제일 알맞은 일. 우리는 내려온 그 길로 기차역으로 가서 뭉클한 포옹을 나누고 서로에게 안녕을 고했다.



 추억이 못내 아쉬웠는지, 수년  일정으로 독일에 들렀을  프라하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프라하성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니  멀리 하늘에 열기구 하나가 둥둥  있는  아닌가. 마치  도시를 함께 누빈 서로의  때를 그리워하는 우리 마음이  하늘에 부유하는  같은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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