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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l 02. 2021

나도 사랑해요, 베네치아!


사랑은 미리   없는 타이밍이다. 때로 계획없는 여행은  터질  같은 감정을, 인생의 오묘함을 깨닫게  주기도 한다.


베네치아로 향하는 기차에서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에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내내 앉아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 긴장이 오롯이 몸과 맘에 새겨진 채 베네치아 역에 내려 아침을 맞았다. 마침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고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내가 베네치아 하면 상상하던 날씨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좀 더 왁자지껄해야 할 것 같은 도시가 약간은 차분한 것이, 그날의 내 마음 같았다.


숙소에 들어갔더니 마침 많은 이들이 안에서 쉬고 있었다. 원래 해수욕을 계획하던 사람들도 제법 있었는데, 이날은 포기라며 차라리 여독을 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나 동행한 친구와 나 같은 경우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였기에 그럴 수가 없어, 짐을 간단히 풀고 바로 자리를 털고 밖으로 향했다.


우리는 무작정 무라노로 향하는 바포레토를 탔다. 바다 위를 움직이는 버스라니. 떨어지는 빗방울이 야속하기보다는, 처음 경험해 보는 상황이 주는 약간의 흥분에 피곤이 잊히며 웃음이 나온다. 막상 바다 위에 떠서 베네치아 쪽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봐 왔던 이 도시를 담은 수많은 그림들의 시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역사의 화공이라도 된 듯, 아깝게 흘러가는 이 시간 속 그곳을 심장에 담는다.


무라노에 도착하니 온 섬 전체가 유리공예 상점으로 가득하다. 오색빛깔 풍선도, 부엌용품도, 액세서리도 전부 세심하게 디자인하고 색을 입혀 유리로 만들어낸 것들이다. 공예란 매 순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일상에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려는 정성 그 자체다. 그 마음을 배울 수 있다면 함부로 버려지는 시간은 없을 듯.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다 집으로 모셔올 수 없으니 이중 아주 작은 기념품 하나를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한다.



이제 우리는 리도로 넘어가는 바포레토를 타고자 역에 자리했다. 하나 버스 번호를 잘못 안 탓에 역에서 그 아까운 시간 동안 한참을 지체하게 되었다. 처음엔 조금 답답하더니, 이내 다 내려놓고 동행과 함께 이어폰 한 짝씩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며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로 기다림의 시간을 채운다.


여기까지 오는 여정 동안 우리는 참 많은 일을 함께 겪었고, 그건 살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중요한 역사이자 우정 쌓기였다. 사실 이곳은 삶의 땀내 나는 현장이 아닌, 여행지다. 그 상황이 주는 일종의 마법 같은 힘 때문에 우리는 24시간을 그저 무장 해제된 채로 어떤 생각과 감정, 모습이든 부끄럽지 않게 나눌 수 있었다. 다시 우리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그 평안함 속에서 현실 속의 나로 말쑥하게 돌아가겠지. 하나, 무엇이 더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우정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헐벗은 모습을 또 다르게 각인시켜주는 게 여행이라는 걸 확실히 느낄 때쯤 리도행 바포레토가 당도했다. 여전히 두터운 구름 때문인지 리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적은 듯. 여름 내내 우리를 힘들게 했던 무더위는 살살 부는 바닷바람과 함께 진정되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낱 작은 존재인 내가, 손에 스치는 공기 한 줌 잡을 수 없어도 어찌 이렇게 부유한 마음일 수 있는 것일지.


드디어 리도에 내리자, 생각지도 못한 기적을 마주했다. 유명한 이곳 백사장으로 다가가는데 역시나 하루 종일 내린 빗줄기 덕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기 힘든 모습이다. 분명 내 머리 위로 구름이 여전한데, 모래밭의 중간 즈음에 다다르자 갑자기 그 무거운 녀석이 무대의 막을 열듯 서서히 푸른 하늘의 얼굴을 드러내 주는 것 아닌가. 이건 말도 안 된다. 계획 없이 찾은 낯선 타향의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마치 생애 단 한번뿐일 것 같은 우리만을 위한 순간을 만난 것이다. 자연은 이 작디 작은 나에게 왜 이런 아량을 베푸는 것일까? 너무 황홀하면서도 위로이고, 먹먹하면서 아프다. 이러한 순간조차 또 흘러갈 뿐이지만, 그것이 삶의 신비이겠지. 그럼에도 기억 속에 오래 저장하고 싶어 모래사장의 조가비 하나를 주어 두 손 고이 모셔 본다.


이제 베네치아 본섬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자, 뱃머리가 서쪽으로 몸을 튼다. 그러자 태양이 내 헛헛한 마음을 알아챈 듯 서서히 내리며 하늘과 바다를 한 묶음으로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베네치아의 바다 위에서 맞는 저녁놀을 내가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아직 좀 전에 맞이한 홍해의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생생한데. 자연이 주는 감동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베네치아의 공기가 끝없이 이야기를 건네니, 내 입술은 감히 화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베네치아 본섬에 도착하여 산마르코 광장에 발을 내디딘 그 순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 외벽에 촘촘히 달린 전구에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불이 들어오더니 음악 연주가 시작된다. 누가 나를 위해 일부러 이 모든 작전을 계획했더라도 도저히 실행하기 어려운 타이밍이다. “벤베누토!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난 분명 들었다. 베네치아의 고백을.


한 도시가 내게 이렇듯 분명한 구애를 한다. 아니, 어쩌면 삶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 베네치아를 통째로 빌려 내게 이렇게 고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https://youtu.be/7Y5cSifT0KM

로시니의 <베네치아의 곤돌라 경기(La Regata Veneziana)>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일정이 늦어진 덕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베네치아 본섬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굽이굽이 놓인 베네치아의 운하를 따라 걸으며 우리네 골목길 같은 공간이 이렇듯 물로 통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신비롭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대운하 위에 놓인 멋진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 스타일의 육교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만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이곳.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니 역시나 이 도시의 화려함과 분주함이 모두 모인 모습으로, 어젯밤의 낭만은 걷히고, 이제 여러 지역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에너지가 넘친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한결같이 그랬을 것이란 게 광장에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진다. 이곳의 중요한 상징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두칼레 궁전에 들어가니, 오랜 시간 물의 도시를 지키던 궁전이자 성인 이 장소의 위상이 새삼 실감이 난다.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하는 궁전의 인테리어에 둘러싸여 창밖을 바라보니, 한결 맑아진 날씨 아래 찰랑이는 물 위로 보이는 뷰 또한 한 점의 그림이다. 여기에 서서 매일처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국의, 타국의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누군가의 마음은 분명 묵직하면서도 포근했을 거라고 믿게 된다.  


두칼레 궁전과 이웃하여 서 있는 역시나 오랜 역사의 산마르코 성당에 들어가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재하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이국적 독특함에 감탄한다. 이곳이 바로 수많은 르네상스 음악인들의 성지이기도 했지. 특히 성당의 건축 양식을 활용하여 분리된 합창단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여 살아 있는 스테레오 음향을 끌어낸 당시 음악인들의 기지가 음악사에서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다. 여러 지역의 최고의 창조력을 지닌 음악인들이 모여 일구어낸 그 생산성은 이후 바로크 시대로까지 이어져, 17세기 베네치아는 특히 ‘오페라’의 중심지로서 이곳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극음악을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퍼지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https://youtu.be/JiyjQzPsy3I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이었던 몬테베르디의 <성모마리아의 저녁기도>를 통해 당시 성당의 음향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상.

https://youtu.be/_isL0E-4TsQ

같은 작곡가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의 마지막 장면이자, 네로와 포페아의 듀엣



한 시대를 풍미한 작곡가들이 누린 울림이 끝없이 살아 있는 산마르코 성당을 나와 천년의 역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한 광장에 서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수 세기에 걸쳐 굽이굽이 이어온 그 깊고도 오랜 삶의 시간들이 날 이곳으로 이끌어 주었구나. 사람의 행복은 숨기어지지 않는다. 베네치아는 내게 삶의 순전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끔 해 주었고, 그때 그 순간, 진심으로 웃게 해 주었다. 그곳에서 누린 행복은 그 오랜 시간 끊임 없이 이곳을 찾은 세상의 사람들이 그랬을 것처럼, 내 마음에 여전히 또렷이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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