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로 큰 계획 없이 떠난 나이지만, 그래도 맘 한 구석 반드시 가고픈 도시는 어느 정도 정해 놓고 있었다. 그중 단연코 매우 앞쪽을 자리하고 있던 피렌체.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이루고 누린, 그리하여 결국 ‘오페라’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이 도시를 어찌 놓칠 수 있을까.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서 오랜 시간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곳. 이곳을 찾으면,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와 창조의 의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내려 도시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찬탄의 연속이다. 역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동명의 성당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지금 어느 시대에 서 있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책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온 그 파사드와 주변 모습에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 듯, 21세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바로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내달리듯 향했다. 그곳을 찾기 위해선 지도를 펼칠 필요조차 없다. 어느 골목 구석구석에서든 나 여기 있다고 내비치는 엄청난 규모의 ‘브루넬레스키의 두오모’ 때문이다. 책으로 상상한 것과 실제로 만나는 존재감은 엄연히 다르다.
기나긴 줄을 뚫고 두오모로 오르기 위해 계단에 입성했다. 한 번 시작하면 500 계단 이상을 쉴 틈 없이 올라야 한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엔 약골인 줄로만 알았던 내가, 어디서부터 이런 체력이 나오는지 매일매일 새롭다.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며 무릎이 무거워지는 만큼, 한눈에 바라보게 될 역사의 도시에 대한 기대감은 커진다. 그런데 바깥공기를 마시기 직전 두오모 내부에서 만나게 된 천장화에 마음이 먼저 녹아내린다. 언뜻 보며 아름다운 색감에 탄성을 올리지만, 자세히 보자면 한쪽은 천국을, 다른 쪽은 지옥을 묘사하고 있다. 대성당의 천장은 이렇듯 세심하게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그 디테일을 보기엔 너무 높고도 먼 당신이었지.
다시금 힘을 내어 막바지 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만나게 된 역사의 뷰. 지금까지도 그러했듯, 앞으로 몇 백 년이 흘러도 그대로일 것 같은 모습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및, 약속이라도 한 듯 붉은빛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지붕들이 내게 말을 건다. 우리는 몇 백 년 전 세상을 선도하며 완전히 새로 일깨운 그 도시고, 넌 그런 우리를 평생 우러러보겠구나. 하나 오늘만큼은 이 작은 나도 하늘의 시선을 갖는 특권을 지니며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이곳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한때는 세상을 뒤집어 놓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멈춘 도시로 남았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그 누구도 이를 조롱할 수 없다는 건, 남보다 앞서 이루고야 만 극강의 미와 자신감에 대한 무한의 경외일 것이다.
오랜 지성의 품 안에 서 있자니 나도 그들처럼 풍요롭고 넉넉한 아름다움을 늘 간직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아마도 변할 수밖에 없고 변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나다움을 잃지 않는, 때론 세상을 역행하는 그런 고고함을 꿈꾼다.
땅으로 내려가 이 도시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활기 넘치는 그곳의 노천카페에 앉아 티라미수와 에스프레소를 먹으며 열심히 일한 다리를 휴식했다. 입 안으로 녹아들어 가는 달콤 쌉싸름한 맛은 분명 현실인데, 눈앞에 보이는 베키오 궁은 전혀 현실이 아니다. 궁금한 맘을 안고 그 앞으로 다가가니, 너무나 익숙한 분이 입구를 지키고 서 계신 것 아닌가.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다. 찾아보니 진품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는 모조품이 서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떡 하니 서서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반기는 모습이 참 의미심장하다. 역사에서 누구보다도 크게 다루어지는 작은 거인의 모습이 딱 이 도시를 닮지 않았나.
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세한 아름다움에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기둥 하나도 그냥 서 있지 않고 빈 틈 없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것이 넘치게 화려하다고 느껴지기보다는, 딱 그만큼이어야 할 것 같은 균형감마저 갖추고 있다. 궁전의 중앙에 위치한 500인의 방에 들어서니 지붕이며 벽이며 번쩍거리는 금빛 장식 사이로 메디치가의 용맹함과 도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그림들이 가득하다. 그런 자랑이 자만으로 읽히지 않는 건, 그럴 만하다는 인정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한 가문의 힘이 이토록 탄탄함으로 이 도시는 결국 예술적으로도 최고의 업적을 낳은 사령탑이 되었으니,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되었든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곳이 이끌고 지켜주었으니.
베키오 궁과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는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 골목은 피렌체의 여러 주요 조각들의 모조품들이 지키고 있어 외롭지가 않다. 아니, 그 사이로 진짜 사람들도 조각들처럼 분장을 하고 서 있다가 누군가가 동전을 던지면 움직이며 웃음을 주고 있다. 피렌체다운 유머를 바라보며 미술관으로 입장하자, 그동안 미술사 책에서 보던 수많은 그림들이 나를 반긴다. 이 상황을 너무나 신기해하며 작품마다 경이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이 시간이 멈춤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드디어 내가 가장 기다리던 보티첼리의 <봄>과 <비너스의 탄생>을 마주하자. 내 입에서는 멈출 수 없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 압도적인 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세한 색감과 고급스런 아름다움이라니.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래로 성화나 역사를 담은 작품 위주로 감상하다, 처음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 비너스가 주인공인 두 작품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현대의 사람으로서도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아, 너무 아름답다!’라는 반응은 분명 나만의 것은 아니다. 마치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은 이런 그림에서 표현해야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작가는 미의 결정체인 주인공을 앞세워 시대를 관통하는 아름다움을 맘껏 드러낸다. 그러면서 땅의 여인들과는 무척 다른 신적인 오라를 잊지 않는 모습에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예술작품을 통해 아름다움을 최초로 탄생시킨 것만 같은 이 보티첼리가 활동한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의 기준은 점차적으로 고대 그리스가 모델이 되었고, 그것은 이 시대를 좌우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후기 르네상스 시기에 이 도시에서 탄생한 ‘오페라’라는 장르 역시 그랬다. 그리스 비극을 당대에 재현하고자 하던 뜻이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벅찬 의지가 가득했던 이곳 피렌체의 비밀이 마치 보티첼리의 그림들에 숨어있는 듯하여, 이를 기념하고자 조그만 엽서나마 구입하여 집으로 가져왔다.
조금은 뜨끈해진 마음을 식히려 이제 이 도시의 젖줄 아르노강을 찾았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베키오 다리를 마주하는데, 오랜 시간 알아온 친구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곳에 서 있자니 단테가 이 근방에서 마주한 영감의 원천 베아트리체가 떠오르며 마음이 풍성해진다. 게다가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서 스물한 살의 딸 라우렛타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 남자랑 결혼 안 시켜 주면 아르노강 베키오 다리 위에서 뛰어들 것’이라며 그 유명한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에서 외친 그곳이 바로 여기 아니겠는가. 7월의 뜨거운 햇살과 진한 우정을 나누던 빛의 아르노는 그런 발칙한 딸의 투정마저 자기에게 떨어진들 따뜻하게 품어 안아 안전하게 어디론가 날라줄 것 같은 온화함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그대로 안고 가는 도시의 젖줄이 가지는 풍요로운 여유가 아닐까. 베키오 다리에 두고 온 그 충만한 마음이야말로 내가 이 도시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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