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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n 21. 2021

사랑과 예술의 별, 베로나


사람들이 내게 이탈리아로의 여름 여행을 한다고, 어느 도시를 가장 추천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베로나’를 외친다. 그것은 내가 이 도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묵었던 유스호스텔에서의 다른 투숙객들의 반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들 중 많은 배낭여행객들은 근처 베네치아의 분주한 관광 모드에 지쳐 그곳에서 날을 채우지 못한 채 계획 없이 이 도시로 넘어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베로나의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이 도시를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과는 다르게 이곳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찾았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야외 오페라 축제라 할 수 있는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무대를 감상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그 이상의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친구와 함께 베로나 기차역에 내려 몇 걸음 걸어 나오자, 우리는 똑같은 반응을 내뱉는다. “아! 여기도 또 다르네! 같은 나라 맞아?”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이미 방문한 페자로나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의 분위기에 흠칫 놀란다. 그리고 그저 좋다. 고즈넉하고 사랑스러운, 보기만 해도 가녀리고 보호해 주고 싶은, 참으로 선이 고운 곳이니.


그 아름다운 정취는 베로나를 관통하는 아디제 강에서 절정을 이룬다. 숙소에서부터 함께 나온 한 여행객은 지금 막 푼 짐 속에서 책 한권만 집어 들고 나와 강 근처 어느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그것이 오늘의 모든 일정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다음에 이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나도 하루쯤은 그렇게 보내리라. 강 위로 흩뿌려지는 햇살, 가로수의 살랑거림으로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바람, 그리고 그 주변으로 보이는 역사의 깊이를 가눌 길 없는 유적들이, 로마의 격렬한 그것과는 사뭇 다른 차분하고도 평화로운 인상을 준다. 아, 이 곁에서 소화하는 아름다운 문자는 어떤 맛일까? 한 편의 흑백 고전영화를 감상하듯 검증된 행복이리.



많은 이들에게 베로나는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는 장소, 딱 그만큼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은 고전에서 다루는 러브 스토리의 정석과도 같은 최고의 낭만인 것인데, 바보처럼 잊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이미 존재하는 베로나의 민담 <로메오 몬테키오와 줄리에타 카풀레티>를 기본으로 하여 이 희곡을 완성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 도시를 세계인이 모두 추억해야만 할 사랑의 장소로 채색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과연 직접 방문하지 않고 그런 디테일한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었을까?  


셰익스피어는 이곳을 분명 방문했을 거라고 이 도시는 나를 설득한다. 아니, 더 나아가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분명 실존했던 청춘들일 거라고까지 납득시키려 한다. 베로나의 유명 관광지의 하나인 ‘줄리엣의 발코니’는 1930년대에 이탈리아 관광청에서 준비해 놓은 상상 속의 장소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세워진 줄리엣 동상에 손을 대야지만 이 도시를 방문한 목적을 모두 달성한 것이라고 여기듯 그 앞에 차례로 줄을 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믿고 싶은 줄리엣의 존재는 베로나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분명 그를 닮았다. 그래서일까. 내가 입고 있는 편안한 현대적 복장은 이곳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나라는 존재가 너무 이방인인 듯 낯설다고 느낄 때 즈음, 친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이곳저곳의 사진을 찍으며 잠깐 나의 캐릭터를 벗고 그때 그 시절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본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살았을, 하나 시대에 갇혀 살았을,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의 나처럼 똑같이 팔딱거리는 심장을 갖고 살았을 그는, 결국 자신이 지키고자 했을 무언가를 현실에서 이겨내지 못한 채 줄리엣처럼 스러져 가야 했을까? 갑자기 내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너무도 고맙게 느껴진다.


뜨거운 태양이 조금씩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 이 도시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아레나 디 베로나’로 방향을 틀었다. 이 원형극장 역시 고대에는 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텐데, 왠지 그곳에서 받은 인상과는 다른 섬세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 신기하다. 베로나의 효과일까. 아니면 지난 백 년간 음악이 다져준 효과일까. 1913년, 이탈리아의 영웅이자 작곡가, 베르디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작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우아한 기운은 공연 시작 전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극장 바닥의 1/3 정도는 무대로, 나머지 2/3는 객석으로 꾸며진 이곳은, 전체를 감싸는 돌계단조차 모두 관객석으로 준비해 놓아 나 같은 여행객들도 부담 없는 가격으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무대 바로 옆 왼쪽 사이드로 티켓을 구입하자, 손에 작은 초가 함께 쥐어졌다. 오늘의 주인공은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죠콘다>. 해가 뉘엿뉘엿 내려가는 저녁시간에 입장하여 돌계단에 자리를 깔고 편하게 앉아 간식거리도 먹고 소곤거리며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를 기다린다. <라 죠콘다> 하면 마리아 칼라스의 극적인 음성으로 익숙한 오페라인데, 오늘은 어떨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주 시간이 다가오니 큰 원형경기장을 둘러싸고 앉은 관객들의 손에 담긴 초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반짝거리는 그 빛은 옆 동네에서도 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도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의 같은 마음을 담은 동경의 별이 되어 경기장 전체를 빛내기 시작한다. 자연의 암전으로 하늘이 드디어 어둑어둑해지고 오로지 별들만 남았을 때 막은 오르고, 나의 스승 패트리샤 선생님이 처음 이곳을 방문한 1969년 인류가 달을 처음 방문했던 그날, 오페라를 공연하던 사람들과 관객 모두가 한 마음으로 달을 향해 건배를 외쳤다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이곳을 처음 방문한 나의 얼굴 또한 마냥 두근거리는 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한 홍조를 띠게 되는 것이다.


<라 죠콘다>가 베로나의 바로 옆 동네인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라 더 정감이 갔다. 무대의 미니멀함은 연주자들의 움직임과 노래에 더욱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사랑과 증오, 갈등의 극적 드라마를 본고장에서, 그것도 이 극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감동을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국의 것을 최고의 기량으로 자랑스레 소개하고, 또 이를 편안하게 감상하는 관객들. 막간의 시간에도 야외라는 자유로움 때문인지 돌계단 위에서 피자와 와인을 즐기며 왁자지껄한 사람들. 좋다. 이 자리를 나도 이미 누리면서도, 언제나 이곳에 늘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이 참으로 부럽다.


감동적인 경험을 이렇게만 마무리할  없어   여름 이탈리아를 떠나기 , 다른 친구와    이곳을 찾았다. 이번엔  페스티벌이 시작할  올린  작품이자, 현재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의 연출로 이어지고 있는,  페스티벌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야외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의 전형이자, 내가 상상할  있는 <아이다> 화려한 모습 이상을 이곳에서 만날  있었다. 이탈리아의  이글거리는 태양마저 웅장한 음악과 이를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에너지로 누그러뜨리는 .  땅에서 태어난 최고의 음악이 시원한 바람과, 무대를 에워싸는 관객들의 작은 별빛, 그리고 은은한 달빛을 만나며 가장  설렘을 주는 .  기억은  마음속에 오래오래 저장되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달과 별이 반짝이고 살랑 바람이 부는 여름밤이면, 그날의   없는 떨림과 감동이 문득 전해져 오기도 한다.


https://youtu.be/5B-c8ea0Sm0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중 '승리의 장면'  @아레나 디 베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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