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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n 01. 2021

다시, 또다시, 로마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지 며칠이 지났다. 첫 만남으로 나름 긴장했던 어깨를 기차 위에 슬쩍 녹여 내려 본다. 뜨거운 공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주는 보슬비로 송골송골 물기 어린 창밖을 바라보니, 집들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평화롭다. 로마로 가는 길, 진정한 순례는 이제 시작이구나!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로마. 여러 매체를 통해 수없이 보고 들으며 자란, 고대로부터 오랜 시간을 지켜온 서구 문화의 중심지. 그러나 그 자리에 서 보지 않고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수많은 역사의 순례자들처럼, 세기의 예술가들처럼, 이렇게 작은 나도 오랜 마음을 먹으니 그랜드 투어를 하듯 그 자리의 공기를 마셔볼 수 있다는 떨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내가 만나고픈 건 로마의 구석구석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뿐만이 아닌 지금 살아 움직이는 모습과 그 속의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절실한 맘으로 찾았던, 역사 속 잠든 이들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로 오기 전, 어린 시절 함께 노래를 공부한 동창 친구가 이 여름 로마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친밀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로마로 가는 길은,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한 며칠 전 보다 훨씬 수월하다. 테르미니 역에서의 뜨거운 번잡함은, 처음 여기 발을 내디뎠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한 느낌을 준다.


나보다 단 며칠 전 먼저 로마에 당도한 친구는 마치 몇 년 정도 그곳에 살았던 양 자연스레 역으로 마중 나와 도시의 구석구석을 안내하듯 소개한다. 나 잘하지? 이러면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갑자기 일상을 도망쳐 나온 듯 베네치아 광장, 스페인 광장, 판테온, 나보나 광장, 콜로세움, 그리고 트레비 분수와 같은 유명한, 그러나 내 눈앞에 있기엔 그저 생경하기만 한 역사적 관광지를 누벼 본다. 아, 이 고도가 뿜어내는 오라에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말이 되는가? 내가 이 '고도'에 서 있다는 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기만 한 평원 사이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스스로와의 투쟁 중 슬슬 자아의 한계를 느끼던 중이었는데. 이건 마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스르륵 잠이 든 사이, 펼쳐 놓은 책 사이로 스며들어가 갑자기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으로 여행을 떠난 그런 느낌. 아니면 음악을 듣다, 그림을 보다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 앞집 옆집이 모두 수천 년에 걸친 역사와 문화의 전당이니 어떻게 실감이 날 수 있을까. 가진 흔적만으로도 충분히 꼿꼿한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는 로마인들은 어쨌거나 부러움의 대상이다.


로마는 태양의 신 아폴로 같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계 속 그들의 위상은 변했겠지만, 그 타고난 기운은 고대의 그것으로부터 조금도 후퇴하지 않을 기세다. 하늘은 구름조차도 달려들지 못할 것처럼 그저 새파랗기만 하다. 창과 같은 햇살이 두 눈 한번 똑바로 들이대지 못하게 찌르고, 숨 한번 고르게 쉬기 어려운 뜨거운 공기는 21세기를 사는 내 머리를 여전히 조아리게 만든다.


몇 주를 더 머문다고 해도 도저히 다 탐험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에 차고 넘치는 고대의 흔적을 지나 만난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콜로세움은 단연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장소다. 그 웅장한 규모는 실제로 보았을 때 상상 이상의 놀라움을 준다. 로마의 하늘을 닮아 여전히 늠름하며 기세 등등한 살아있는 호랑이다. 사람과 짐승의 피비린내와 오랜 건축물의 매캐한 냄새가 뒤섞여 여전히 잔인하고 서슬 퍼런 기운을 풍기니까. 마음이 콩알 만해 지려 하자, 일부 무너진 내부의 모습은 이 모든 것이 2000년 전의 기세임을 천천히 알려 준다.



판테온은 또 어떠한가. 내부로 들어가면 더욱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탄복하게 되는 이 건물은, 조명 하나 없이도 내부를 밝게 비추는 돔 중앙에 뚫린 커다랗고 둥근 구멍과, 기둥 하나 없이도 이 큰 원통형 건물을 든든히 받쳐 주는 공법으로 2000년 후에 만난 현대인들을 기죽인다. 지금은 로마를 거친 주요 인물들의 무덤들로 그 경건함까지 갖추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는 또 어떠한가. 특별히 로마의 수많은 역동적인 분수들 가운데, 나보나 광장의 분수들 중앙에 놓인 그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조각들은 또 무엇인가. 툭 걸쳐진 옷가지가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것 같고, 인물의 근육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생동감 넘친다. 특히 중앙에 놓인 4대 강의 분수를 지키고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상은 온몸으로 표현하는 특유의 연기력으로 웃음마저 짓게 한다. 산타 아녜제 인 아고네 성당이 배경이 되어 완벽한 그림이 완성되도록 한 베르니니의 연출력 또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걸작이다.




https://youtu.be/aSVOR3_aJ3M

레스피기 <로마의 분수>



인간의 한계를 모르던 사람들이 남긴 셀 수 없이 많은 로마의 유산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건드린 것은 나보나 광장 근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 내에 걸려있는 카라바조의 그림 <성 마태오의 부르심>이다. <성 마태오의 영감>과 함께 이곳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이야말로 로마의 수많은 성당 가운데 이후에도 이곳을 가장 자주 찾게 된 원인이 된다. 돈은 많으나 죄 많은 신분으로 여겨지던 세리 마태오가 세관을 찾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을 포착한 이 그림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기피하던 세리를 직접 찾아와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파격, 그리고 그 순간 반신반의하는 마태오의 얼굴에 쏟아지는 빛이 인상적이다. 그 빛은 내 길에서 주저하고 있던 나에게도 유효하게 다가와, 이후 나를 묵묵히, 겸허히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큰 빛줄기가 된다.



어느새 영원할 것만 같던 로마의 뜨거운 햇살도 땅으로 내려와 잠이 들기 시작하고, 여전히 세상을 호령할 것만 같던 이 고도도 노란 조명을 입자 사뭇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어찌 보면 인간의 잔혹한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저 콜로세움도 현대의 밤에는 낭만을 가득 담은 모습으로만 남을 뿐인 것을. 낮에는 땀과 소음으로 복작거리던 주변이 어느덧 사랑과 우정의 낮은 속삭임으로 가득 찬다. 근처 벤치에 잠시 앉아 있으니 언제 그리 뜨거웠냐는 듯 시원한 바람이 살을 스치는데, 그게 나 살던 곳에 놓고 온 그리운 사람들을 그렇게 보고프게 하였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이날의 마지막 코스로 그 유명한 트레비 분수를 잠시 들렀다. 이곳에는 전통이 있다. 분수대를 등지고 서서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지면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타향을 떠돌며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해 왔다. 특별한 만남은 한 번의 짧은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안고 갈 만한 깊은 여운을 주지만 그래서 더 서운하고 아프고 그럴 수 있기에, 겉으로는 이별에 대해서 내성이 생긴 마냥 담담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점점 더 깊이 울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트레비 분수의 세리모니가 정말 좋다. 다시 함께 하자는 약속을 어떤 장소와 이렇듯 단단히   있다니. , 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까지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던 나의 소중한 만남에 ‘ 보다는 ‘ 만나라는 의식적인 최면을 걸어둘 것을. 그럼 이별에 대한 쓸쓸함에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있었을 것을.


나는 바다의  넵튠을  증인으로 하여 부랴부랴 등을 뒤로하고 동전을 . 다시, 또다시 와야 하니까. 이곳.





#이탈리아 #로마 #여행 #여행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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