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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May 30. 2021

꿈의 본향 이탈리아, 그리고 페자로


바깥 나라로 떠난 지 근 십 년 만에, 대서양을 넘어 또 다른 큰 발걸음을 옮긴다. 50일이라는 긴 여정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보기로 한 것이다. 학부 때 배운 이탈리아어는 음악 공부에 큰 도움이 되어 주었지만, 실제로 현지에서 부대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낯선 곳으로 홀로 움직일 생각을 하니 출발 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울렁거림이 전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한 긴장감이다.


하지만 여행은 준비과정이 제일 설렌다고 했던가. 오랜 시간 마음에 둔 그곳을 상상하며 사방에 전화를 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행서적을 읽으며 보고픈 곳, 하고픈 일을 마음에 저장하고, 가방에 꼭 필요한 짐만을 가려 넣는 일은, 그동안 묵혀둔 상념을 차근히 정리하는 것과 같은 청량감을 선물해 주었다.


"너는 이탈리아에 한번 가 봐야 해."

"선생님. 본고장에 가서 공부를 해 보아야 한단 말씀이시죠?"

"아니, 그런 것 말고. 그냥 만나라구. 사람들을, 음식들을, 그 사람들의 문화를.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이 떠드는 것만 보고 들어도 알 거야. 그걸 하라구."


사람의 삶에서 찰나의 순간조차도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가? 수년 전 존경하는 선생님과 나눈 짧은 대화는 내 맘 속에 자동으로 새로운 꿈과 여정을 심어 주었다. 그곳엔 있나 보다, 내가 찾던 본질적인 것들이. 바람이 바로 현실이 될 수는 없었지만, 결국 오랜 시간 이를 위한 노력을 하고 기회를 찾게 된 것이니. 결국 그 자리에 가방 하나, 편한 신발 하나, 작은 사진기 하나, 노트 하나, 그리고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이 범벅이 되어 그렇게 흘러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여정은 페자로에서 시작했다. 중요한 동부 해안도시인 앙코나와 리미니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뜨거운 공기를 느끼며 로마 땅을 밟은 후 바로 환승하여 앙코나 공항에 도착하니, 페자로의 음악원에서 가르치시는 지휘자 선생님께서 나를 마중 나와 계셨다. 선생님은 본가가 앙코나에 있어 방학이 되면 이곳으로 내려와 계시므로, 학기 중 페자로에서 지내시는 방을 내게 한 달 동안 빌려주시기로 한 것이다.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셨지만 영어라고는 ‘헬로’밖에 할 수 없는 분과, 더듬더듬 이탈리아어를 끄집어내는 한국 여자의 대화는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선생님의 차에 동석하여 어색한 자세를 취하며 내가 왜 또 이런 모험을 강행하고 있는지 두려움이 슬슬 엄습할 때쯤, 차창을 타고 전해 오는 바깥의 풍경. 아. 이곳이 이탈리아인가. 내가 그토록 와 보고 싶어 하던 그 나라인가. 수년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그리워하던 그인가! 눈 뜨고 사방을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번뜩이는 햇살 아래, 어느 순간 차창 한가득 메운 해바라기들이 줄지어 나에게 화답한다. 네. 저예요! 환영해요! 창문을 살짝 열어 더운 공기에 범벅이 된 그 살가운 내음과 함께 이탈리아와 수줍게 첫 포옹을 나눈다.



이탈리아의 시골 풍경은 미국과는 다르게 좀 더 눈에 친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 같다는 생각이 들게도 할 만큼 섬세한 모습이다. 산골짜기 숨은 계곡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도 보이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열심히 밭일을 하는 일꾼들도 보이고. 나도 모르게 단단히 무장할 뻔한 마음이 슬슬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이곳으로 처음 향하게 되었던 나의 설레던 첫 마음이 소환됨을 느낀다.


이렇게 차로 약 30분 정도 북으로 올라가니 어느덧 해안가의 절벽이 줄줄이 보이며 푸른 바다를 만난다. 바다는 어디에서 만나든 낯설지가 않고 고향 같다. 해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지? 같은 반도국가여서일까? 역시나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이곳 바다를 바라보며 차에서 내려 사진도 찍고, 절벽 위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지금도 입안에 그 짭조름한 신선함이 맴도는 홍합 스파게티도 먹고, 커피를 처음 맛본 사람처럼 놀라워하며 카푸치노를 마신 후 숙소로 향했다. 아, 이곳에 파바로티의 별장이 있다지. 오감을 자극하는 이탈리아 바닷가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흘러간다.


페자로는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지역이지만, 음악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장소다.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 죠아키노 로시니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도심으로 들어서니 로시니가 마치 이 아담한 도시의 모든 것인 양 골목 구석구석을 장악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로시니 음악원은 당연히 이탈리아 내 주요 음악원의 하나이다.





또한 로시니를 기념하는 동명의 페스티벌도  도시의 자랑이다. 평소 조용한 이곳이 매년 여름 페스티벌 시즌을 만나면, 거리마다 로시니의 얼굴과 이름으로 더욱 가득 채워지고, 그의 오페라가 현란하게 울려 퍼진다. 유럽에서 로시니의 위상은 그가 살아 활동한  200   대단했고, 19세기 벨칸토 오페라의 아버지로서 이탈리아의 음악 역사에서 그의 역할은  나무 기둥과도 같으니, 그의 고향이 그로 인해 영원히 찬란하게 빛나는  당연한 일이다.


https://youtu.be/Ur7-OAJwvCE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하지만 기대감 넘치던 첫날과는 달리 초반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들도 경험하며 가까스로 적응을 한 후, 수일이 지나 로시니 음악원을 찾아가 사전에 소개받은 친한 언니의 은사님을 만나 느린 의사소통으로 레슨을 받았다. 노래. 그래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 또 그거였지.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를 부른다는 건, 미국에서 노래하던 상황과는 또 다른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준다. 다행히 선생님의 의견은 그동안 내가 지켜왔던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용기를 주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벨칸토 음악의  프레이즈  꾹꾹 감당하고  , 선생님께서는 더욱 반가운 말씀을  주셨다. 이곳에 한국인 피아니스트 유학생이 있으니 그가  체류 동안 반주  여러 가지를 도와줄  있을 거라고. 존재만으로도 반가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시내 어느 노천카페에서 만났다. 나보다   어린 동생인데도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외모에는 어딘가 모를 듬직함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머나먼 타지에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공통점이 있어서였을까, 도저히 처음 만난  같지 않은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당면한  문제들을 삽시간에 해결해 줌은 물론,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어 주었다. 처음의 긴장은 어느새  풀리고, 오래 기다린, 꿈에 그리던 이곳에서의 시간을  보낼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만이 .


여행의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떠나 휴식을 선사하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나 내게  여행은,  여행만큼은 꿈의 본향을 찾아온 순례의 과정이다. 그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걷다 보면 어느새 보이지 않을까. 역사의 거리에 구석구석 숨겨진, 내가 찾아온  보물들이





#이탈리아 #페자로 #로시니 #로시니페스티벌 #여행 #여행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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