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찌르는 마천루와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 거리를 꽉 채우는 움직이지 않는 차들과 세상의 모든 세련됨은 다 가졌을 것만 같은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뉴욕.
세상 모든 일들이 거의 다 그렇겠지만, 상상과 실제가 비슷한 경우는 드물다. 수년 전, 뉴욕에 장기간 머물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그쪽으로 출장 나온 사촌언니를 만날 일이 있었다. 당시 언니는 세계의 여러 지역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의 첫 소회는 이것이었다. “여기 사람들, 원래 이렇게 칙칙해? 미디어에서 보인 것과 왜 이렇게 달라?”
뉴욕은 깔끔한 사람들에게 특히 불편한 도시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케케묵은 냄새에는 설명하기 힘든 온갖 것들이 담겨 있다. 잠깐 같이 살던 룸메이트는 결벽증이란 놀림을 받을 만한 친구였음에도 지하철에서 벼룩을 옮아 심하게 고생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5번가를 걸어 내려가면 세상의 자본은 모두 발라 놓은 것 같은 건물들과 그 안의 휘황찬란한 인테리어 역시 현실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쓰윽 아래를 내려다보면 느껴지는 그 특유의 존재감은 역시는 역시, 뉴욕만의 것이다.
뉴욕은 내가 처음 유학을 간 지역에서 약 2시간 정도 운전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여러 상황으로 인해 가장 자주 방문하게 된 지역이기도 했다. 몇 달 정도 방을 구해 머물기도 했었거나와, 맨해튼 자체가 워낙 규모가 크지 않아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남에서 북으로 걸어서도 충분히 관통 가능하기에,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복작거리는 정경이 생생히 드러난다.
이렇듯 살가운 뉴욕의 첫 방문을 더듬어 보면 정말이지 관광객 모드였다. 랜드마크 앞에서 찰칵 순간을 담은 사진들 속에는 역사적 아픔을 담은 세계 무역 센터도 여전히 건재하다. 자유의 여신상 주변을 도는 유람선을 탔을 때의 기억은 제일 예쁘게 남아 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선상에서는 재즈가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었다. 동행들과 정겨운 리듬에 목을 까딱거리는 사이,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 흑인 노부부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블루스에 몸을 맡겨 춤을 추시는 것 아닌가. 깔깔거리는 소리조차 차분히 내릴 시간이기에 그럴까. 그분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깊고 사랑스러워서일까. 누군가의 참으로 개인적인 춤을 보며 그렇게까지 감동한 적이 있었던지.
대륙을 넘어 처음 먼 길 떠나온 소녀는 거리거리에서 세상의 온갖 언어를 듣는다. ‘이곳은 미국인가, 아닌가? 이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인가’라고 느끼던 중, 당시 들었던 뉴스는 센트럴 파크의 호수 위에 한 여성의 사체가 둥둥 뜬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강력범죄가 없었던 것은 전혀 아니나, 그곳처럼 그렇게 빈번하고 쉬이 들을 수 있는 소식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 미국 생활은 시작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진정 깊이 만날 수 있으리라는 반짝거리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범벅이 된 채. 평생 운전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던 겁 많은 몸치인 나는 당장 면허부터 따고 최대한 사람들에게 튀지 않을 쑥색 미국 중고차를 구입했다. 당시 뉴욕에는 친한 친구들 두 명이 역시나 비슷한 시기에 나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식료품점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데 옆구리에 누군가 총부리를 들이밀었다고. 그는 ‘일거리를 달라’ 외치며 난동을 부린 것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친구는 다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트라우마는 꽤나 오래, 사무치게 남았을 것이다.
다른 친구는 당시 다니던 학교와 가까운 맨해튼 북부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한때 범죄의 소굴이었던 할렘 지역이지만, 당시 미국 시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방학만 하면 내 오랜 친구를 찾아 며칠을 함께 보내곤 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제일 끝자리에 앉아 눈과 귀를 정화하며 감동과 배움을 얻기도 하고, 여러 미술관에 들어가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충전하기도 했다. 뉴욕은 내게 현대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도시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무엇보다 12월에 찾은 맨해튼은 건물마다 형형색색 휘황찬란한 장식으로 휘감은 모습으로, 좀 전까지 무채색 하늘 아래 격무에 시달리다 온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엊그제 사촌동생에게서 온 성탄 카드에 쓰인 문구가 바로 이런 모습을 상상한 것 같았다. “언니, 그곳은 성탄 분위기로 엄청 예쁘고 화려할 것 같아!” 록펠러 센터 앞에 설치된 야외 빙상장 위에서 뒤뚱뒤뚱 스케이트를 타며 오색빛깔 전구가 꽉 박힌 초대형 성탄 트리 아래 삼삼오오 함께 하는 시민들과 방문객들의 행복한 얼굴을 바라보자면 내 얼굴에도 자동으로 미소가 스몄다. 하나 그 모습 위로 조금 전에 마주친 한 남자의 지친 얼굴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한 건물에서 나오는데 5미터 뒤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빠른 속도로 따라 나오던 그를 발견하고 문을 다소 오래 잡고 기다리고 서 있었더니, 감동한 얼굴로 ‘Oh, you made my day!’를 건네는 것 아닌가. 뉴욕에서는 작은 친절이 이렇게 드물고 소중한가,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친구 몸 하나 누이기에도 좁은 방에 기어들어가 살을 맞대며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는 반가운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이 아까운 나날 중 하루 이틀을 열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매일 4-5시간 자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던 긴장이 다 땀으로 배어 나오는 듯했다. 친구가 잠깐 일하러 나간 사이 혼자 방안에 누워 있으면, 창밖으로 끊임없이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경적 소리가 친근해질 지경이다. 친구도 잠이 부족할 텐데, 이 소리를 어찌 견디고 지내는지. 역시나 그 녀석도 은연중에 종종 드러내는 여러 정황이 그동안 얼마나 고독하게 이 퍽퍽한 삶을 애써 버텨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예술가들은 그렇듯 찬란한 젊은 날 이역만리로 날아와 꾹꾹 많은 것들을 삼키며 묵묵히 걸어가는 중이었다.
https://youtu.be/pHyN3izk38c
세상에서 젤 바쁘다는 맨해튼의 건너편. 그곳의 봄빛 아침은 그날따라 반짝이며 여유로웠다. 박사 졸업논문을 끝내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다시 찾은 뉴욕에서의 시간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준비된 졸업 선물 같은 것이었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내고 머물고 있는 아파트 근처를 산책하던 중, 엊그제 맨하탄에서 공부하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나눈 티타임이 떠올랐다. 젊은 예술가로서 사회에 한 발짝 더 내디딘 우리는 그의 생일과 나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여유로운 오후 한때를 향긋한 티와 오색빛깔 디저트를 나누며 보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에 헌신하며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누리기 어려웠던, 그렇기에 부려보고픈 작은 호사의 시간이었다.
사실 예술로 나를 내어 놓는 과정에서 그 방향은 조금씩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산책 중에 발견한 십여 년 전과 똑같이 서 있던 어린 나. 그 소녀가 생각하던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찌 보면 많이 비슷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다행히 그 아이가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의 맑은 눈길에 내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 많은 길을 걸어왔고, 그 길의 모습이 어떠한들 묵묵히, 열심히 살아왔고, 혹은 방황하며 걸어온 순간순간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소중하단 걸 이제 그 아이도 잘 알기 때문 아닐까. 하나의 챕터는 조용히 막을 내렸고, 이제 이날은 어여쁜 에필로그 같은 것인지. 조금 큰 내가 많이 수척했고 메말랐던 어린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반짝이는 기회를 만난 것이다.
그 아이와 하나가 되어 간절히 기도했다. 십 년 후의 나와도 그렇게 따뜻하게 조우할 수 있기를. 그리고 또 다른 나와 같은 물기 없이 퍽퍽한 심장을 가진 아이들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십 년이 지났다. 맨하탄에 두고온 그리운 그때의 나와 다시 만난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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