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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l 13. 2021

음악과 삶의 이정표, 빈


지금껏 방문한 유럽의 여러 도시들 중 첫 만남이 가장 아쉬웠던 지역이 바로 오스트리아 빈이다. 그건 그곳에서의 기억이 나빠서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함께 하는 친구들과 남긴 사랑스러운 추억이 많다. 결국  이 아쉬움은 시간이 부족해서 온 것이다. 첫 여행에서는 여러 도시를 거치느라 각 도시를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빈은 내가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찾았던 도시임에도, 방문한 요일에 많은 주요 건물들이 운영을 하지 않아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음악회 역시 여름이라 시즌이 아니었고 말이다.


하나 여행지 역시 첫 만남부터 무조건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걸 가르쳐 준 곳도 바로 이 빈이다. 사람도 만날수록 점차 매력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첫 방문에서 아쉬움이 컸던 만큼, 이후 수년이 지나 일로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아예 한 달 정도 비우게 된 시간을 빈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그 첫 만남의 아쉬움 때문이다. 음악인으로서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빈을 구석구석 보고 느껴보고 싶었기에.


막상 한 달을 이곳에 있자니 빠른 속도의 여행은 필요치 않았다. 처음 유럽을 방문했을 때처럼 여행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이곳에서 살아본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다음 달에 공연할 오페라를 준비해야 하므로 바쁘기도 했지만, 이때는 앞날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속 정리가 많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마침 빈에서는 오랜 고등학교 동창 다수가 음악 공부 및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빈에서 가장 유명한 젤라토 가게에서 다 같이 모여 생각지도 못한 미니 동창회를 열며, 오랜 시간 타지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데서 오는 기쁨과 아픔, 회한을 함께 풀기도 했다. 그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큰 위안이다.


빈에서 있는 한 달 동안은 오페라 스코어를 가방에 넣고 하루 한 곳 정도 가고픈 곳이나 카페를 찾아 그곳에 죽치고 앉아 악보 분석을 하다 지치면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때 내가 가장 자주 찾은 곳은 빈 근교의 숲, 칼렌베르크 언덕이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 보면 베토벤이 젊은 시절 귓병을 치유하고자 찾았던 하일리겐슈타트가 종착역이다. 역사에서 나와 38A 버스를 타고 종착역까지 올라가면, 언덕 바로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청포도 밭의 달콤한 향기와, 저 멀리 빈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지는 근사한 장소가 나온다. 이 위치에 바로 내가 자주 가던 카페가 있는데, 당시만 해도 이곳이 잘 알려지지 않아 평일에 가면 사람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다.


조용한 카페  통유리 바로 앞에 앉아 높은음자리표가 그려진 멜랑주 커피  잔과 아펠슈트루델(오스트리아식 사과파이) 시켜 놓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여자는  그래> 악보를 펼쳐 놓으면 음악공부가 절로 . 당장 공부해야  작품일 뿐인데, 우연찮게도  도시에서 나온 작품이란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집중하다 보면 어떤 상념도  잊고 음악에 몰입하게 되는  , 베토벤 역시 이곳에서 이런 종류의 평안함을 느꼈겠구나, 그래서 고통 중임에도 오히려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겠구나, 나도 모르게 그의 마음과 만나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https://youtu.be/1war_8aQhKA

모차르트의 오페라 <여자는 다 그래> 중 삼중창 "부드럽게 부는 바람(Soave sia il vento)"



어느 날은 칼렌베르크 산 중턱으로 내려가 보기도 했다. 그곳에도 뷰가 좋은 큰 카페가 있어 원래 거기에 머무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창밖을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포도밭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레 그들의 뒤를 쫓아 보았다. 한 여름의 늦은 오후 포도밭 가운데로 난 길을 걷고 있자니, 수확을 기다리는 영근 초록 알들이 내뿜는 진한 향기가 마치 나를 작은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느낌이다. 그 신선한 향에 다 취할 때쯤 빈 시가지가 한층 더 잘 보이는 야외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사람들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이었고, 나도 자연스레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곳은 포도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직접 빚은 와인과 간단한 식사를 파는 호이리게(오스트리아식 선술집)였다. 마당의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사이로, 혼자 작은 테이블에 앉아  지역의 전통 와인 리슬링을   주문했다. 바로  자리에서  담근 새콤달콤한 화이트 와인의 맛이란 얼마나 환상적인지, 이걸 혼자만 맛보고 있다는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뭐든 최상의 것이란  실감하는 순간이다.



공부를 하다가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을 때면 여느 관광객들처럼 도심을 둘러싼 반지 모양의 링슈트라세 길을 한 바퀴 도는 트램을 타고 이 도시를 대표하는 건물인 부르크 궁전과 국회의사당, 오페라 하우스, 미술사 박물관 등의 세련된 모습을 바라보다, 그날 가고픈 곳에 내려 천천히 관람하기도 하였다. 아니면 이 도시 사람들처럼 가볍게 도나우 강 근처에 가서 강바람을 쐬기도 하고, 시립공원에 가서 호수 근처에 앉아 멍하니 오리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넓디넓은 쇤브룬 궁전 정원의 아름다움에 취해 걸어보기도 하였다.



사실 맨 처음 빈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은, 학교 어느 교수님께서 빈의 표현주의를 설명하다 이 쇤브룬 궁전 정원을 슬라이드 사진으로 보여주셨을 때였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는 조금 다르게, 화려하지만 우아한 섬세함을 잊지 않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원이란 권력과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고, 표현주의는 이 모든 전통을 파괴하면서 나온다. 빈은 가장 늦게까지 제국을 지킨 도시이자, 가장 혁신적인 예술을 탄생시킨 중심지이기도 한 그 반전의 매력이 곳곳에 가득한 곳이다.  




사실 그동안 음악인으로 살아오면서 빈을 제대로 방문한 적이 없을지라도, 내 마음은 수많은 순간 이곳에 있었다. 교향악의 아버지 하이든에서부터 무조성 음악의 창시자 쇤베르크까지 빈에서 활약한 주요 음악인들이 너무나 많고, 이곳은 그들이 살던 집, 그들이 활동한 장소들이 정성스레 보존되었으며, 이곳에서 작곡한 그들의 음악이 연일 연주되는 음악의 보고다. 나는 이런 장소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작곡가들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음악을 만나고자 애썼다. 당시 공부하고 있던 모차르트의 집도 그런 중 하나다.


빈에서 이렇듯 개인적인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여름은 황금홀로 유명한 무직페라인, 콘체르트하우스,  국립오페라 극장  세계적인 음악회장에서 음악회를   있는 시기가 아니라는   방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시청  광장에서 7월이면 매일  틀어준다는 영상을 보러 가는 일로  허기를 메우기도 하였다.



하루는 아예 통째로 쉬자며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오기도 한 프라터 놀이공원에 있는 관람차를 타러 갔다. 1897년에 만들어졌다니, 100년도 더 된 관람차를 탄 건 처음인 듯. 그래서인지 탑승했을 때, 마치 오래된 집에 들어간 것 같은 포근함과 낡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한 칸씩 건너서 탑승시키기에 안전을 위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앞 칸에 로맨틱한 테이블이 귀엽게 세팅되어 있다. 프러포즈용으로 비워 놓은 공간으로 보였는데, 이곳의 유명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살짝 덜컹거리며 위로 올라갈수록 빈숲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멋진 빈의 정경이 펼쳐지니, 그 얼마나 훌륭한 청혼의 공간이 되겠는지.



빈은 역사적 성당으로 가득한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를   동안 지켜온 중심 슈테판 대성당은  첨탑을 도시 어디에서나 발견할  있는 이정표와 같은 곳이. 중세 고딕 스타일의 슈테판 대성당과는  다른 멋으로, 바로크 스타일의 베드로 성당과 카를 성당은 내부가   환하고 둥근 천장이 포근함을 준다. 거리를 한참 돌아다니다 지칠 때마다 아름다운 성당에 들어가서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를  적이 많다. 도심과 약간 떨어져 있는 포티프 성당(봉헌 성당)에는 마침 초의 의미를 담은 기도문이 놓여 있다. 음악가이자  사람으로서 나의 수많은 여정은 결국  의미를 찾는 과정이겠구나, 빈은 내게 이런 이정표를 선물해준 소중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번이고 다시 방문하게 ,  마음이 곳곳에 흩뿌려지듯 놓여 있는 .


...주님, 제 앞에 놓인 초 하나가 쉬지 않고 타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고, 때로는 더 큰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주님, 저 또한 때로는 쉬지 않고 달립니다. 제가 당신 안에서 쉼을 찾을 수 있게 하소서. / 초는 제게 빛과 열을 줍니다. 주님, 저 또한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 초는 타서 사라지며 스스로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로 소멸합니다. 주님, 저 또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 이 초로 저는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주님, 저 또한 스스로를 봉헌하여 다른 이들이 빛날 수 있게 하소서... (미르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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