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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l 14. 2021

도나우 강의 선물, 멜크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 달 동안 묵었던 그 여름, 근교로 나간 날은 단 하루였다. 목적지는 전부터 너무 가고 싶어 벼르던 멜크라는 곳이다. 멜크는 빈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작은 도시로, 움베르토 에코가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쓸 때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진, 천년의 역사를 지닌 베네딕토 수도원이 그 중심으로 있는 곳이다.


사실 수도원도 너무 궁금했지만, 이곳에 가면 빈에서보다 도나우 강을 훨씬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오늘날의 빈의 도나우는 어쩐지 내가 예술을 통해 상상하던 그 강이 아니었다. 빈 기차역에서는 멜크 관광을 위한 콤비네이션 티켓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빈에서 멜크까지 기차로 약 한 시간 정도 이동하고, 수도원을 관람하고, 멜크에서 크렘스라는 지역까지 배를 타고 도나우 강을 이동하고, 크렘스에서 빈으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꽉 찬 여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어느 민박집에서 한 달 동안 장기체류를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바뀌는 룸메이트며 옆 방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여행 정보를 가르쳐 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위탁 근무를 하고 계시던 이 민박집의 이모님조차도 나에게 이 도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여는데 공기가 어찌나 신선하고 하늘은 맑은지. 이날이야말로 멜크로 떠나야 하는 날이라는 신호가 왔다. 아침 식사 시간, 오늘은 어디로 가냐고 물으시는 이모님께 멜크를 간다 말씀드리니, 그곳이 그렇게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셨다며 오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은 나에게 붙으라는 공표를 하셨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전날 숙소로 들어온 자매 같은 두 친구와, 절친 이상의 케미를 보여주는 형제 두 명과 함께 멜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나 역시 초행인 곳으로의 여정을 이끌며 조금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과 조금씩 편히 말을 섞게 되자 내 동행들이 얼마나 맑고 착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한 친구들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좋은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의 맛은 배가 되기 마련.  


짧은 기차여행 중에도 간간히 밖으로 보이는 자연이 기대감을 높인다. 멜크 역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작은, 평화로운 동네에  안도감에 낯선 곳에  약간의 긴장마저  풀리는 느낌이다.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들 위로 어디서든 보일 법한 높은 곳에 요새처럼 압도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베네딕토 수도원이 등장했다.  존재감은 멜크가  근교의 작은 동네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내려놓게 만들었다.



수도원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은 오랜 나무들과 집들과 돌길이 어우러져 그 자체가 소박하나 가볍지 않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같이 오기 잘했다고 생각할 즈음, 수도원 입구가 나타났다. 아, 쇤브룬 궁전에서 보았던 파스텔 톤의 노란 빛깔 아닌가. 섬세하면서도 우아하고 고상한 배경과 천사들이 든든히 지키고 있는 정문을 통과하니, 마치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물의 요정이 하늘을 향해 물을 뿜고 있는 분수가 자리하고 있는 궁정을 통과하여 들어가니, 베이지색 배경에 우아한 파스텔 빛 핑크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내부가 우리를 반긴다. 수도원인 만큼 차분한 맘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니 이곳의 역사를 소개하는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화마로 원래의 건물은 사라지고, 우리가 들어간 건물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여러 역사적인 성물과 제의 등을 감상하고 나오니 어느새 화려한 대리석 홀이 등장했는데, 합스부르크를 찬양하는 천정화와 기둥을 장식하는 금빛 문양 등도 멋지지만, 창문 밖 풍경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을을 지키는 성당과 옹기종기 모인 붉은 빛깔 지붕들, 도나우 강과 이를 감싸는 울창한 숲이, 막힌 숨을 뚫어주듯 모두의 탄성을 이끈다.  




다음으로 나온 공간은 아마도 이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중세에는 책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지닌 수단이기에, 이렇듯 장서를 보유한 수도원의 힘과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수사들의 위치는 막강했을 것이고, 그런 부분이 움베르토 에코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테다. 도서관이기에 전체적으로 나무 톤이지만, 기둥에 금으로 포인트를 준 것과 천정화의 스타일은 대리석 홀과 대칭을 이루며 이 방의 의미를 상승시킨다. 이곳에서는 원래 정보의 독점을 깨는 중심이 된 구텐베르크가 1460년 인쇄, 출판한 성경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1996년, 이 건물 보수공사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로 이를 넘기게 되었다고 하니,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든다.




역사를 간직한 책들로부터의 오묘한 기운을 느끼며, 이번에는 수도원 성당으로 발을 들여 보았다. 바로크식 둥근 천장과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화사한 내부의 인테리어, 그리고 성인들을 묘사한 에너지 넘치는 성화들... 빈에서부터 이미 익숙한 양식이지만, 더욱 많은 금장식으로 그 화려함이 배가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 기도가 끊이지 않고 지속된 공간 특유의 엄숙한 공기에 순간 압도되어 나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짧은 기도를 이어간다.



멜크 수도원을 열심히 관람하고 있자니 어느새 점심시간. 수도원에는 큰 정원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 내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여기에 곁들이는 음료로 이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빚은 달콤한 리슬링 와인을 선택해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동네다운 향긋한 식사를 마치고 정원 산책을 하며 푸른 자연을 벗 삼아 걸으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한가로운 가운데 소소한 이야기꽃이 피는, 이들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지, 이것이 여행인지 잊을 정도로 그저 평온하기만 한 시간.



이제 우리는 멜크 선착장으로 나와 크렘스로 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바로 이 구간을 바하우 계곡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좀 전에 마신 리슬링은 바로 이 계곡에서 생산한 와인이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도나우를 가까이에서 만나는구나. 우리는 사이좋게 배 위에 올라앉아 아랫동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느릿느릿 주변 경관을 감상했다. 강 위에서 올려다보는 멜크 수도원도 웅장하고 멋지지만, 강의 양 옆으로 장대하게 펼쳐진 포도밭에서 솔솔 불어오는 청포도 바람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낙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이때, 한 친구가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 주었다. 거기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다지 즐겨 듣지 않았던 이 왈츠가 왜 이렇게 아름답게 들리는지. 이렇게 깨닫는다. 도나우는 왜 자연 속에서 만나야 하는지. 그 바람, 그 향기, 그 음악,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 이날 이 배 위에서는 지금만이 중요한 것처럼 잠시 멈추어 순간을 영구 저장한다..


그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절실히 깨달았다. 때로는 여행이 선사하는 우리만의 아름다운 끊어짐의 순간이야말로 다음을 걸어갈 힘을 준다는 것을. 내 마음 한 조각은 그날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리듬과 함께 그곳에 영원히 남아 흐르며 일상의 내게 든든한 손짓을 보내고 있다.


https://youtu.be/cKkDMiGUbUw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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