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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텐 Jul 17. 2021

깊이와 열정의 유산, 바이마르


독일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입국 심사를 거치고 나오자 한 사람이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바이마르’라고 답하자 그의 눈은 두 배로 커졌다. 너무나 아름다운, 깊은 전통의 도시에 간다며 함께 기뻐하는 그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나는 바이마르에 음악 활동을 위해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관광을 위해 독일에 입국한 외국인들이 ‘바이마르’ 위주로 방문하는 경우는 아마 드물지도 모른다. 바이마르는 걸어서 전체 한 바퀴를 도는 것이 큰 부담이 없을 정도로 작고 조용한 도시인 데다, 화려한 볼거리 같은 것은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설문조사를 하던 그의 진심을 믿는 것은, 그동안 바이마르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부족하지 않게 접해오기도 했거니와, 한 달 동안 실제로 체류하며 이 도시가 지닌 깊이와 힘이 얼마나 큰지 몸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 문학의 양대 산맥과도 같은 괴테와 실러가 같은 시기를 이곳에서 보낸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은가. 기차역에 도착하여 시내 중심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국립극장 바로 앞에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두 사람의 동상이 면류관을 함께 쥐고, 마치 이상향을 찾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음악의 새로운 세기를 연 리스트와 바그너의 역사가 바이마르에 새겨져 있고, 현대 건축과 공예 분야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가지는 ‘바우하우스’ 역시 이곳에서 설립된 것만 보아도 이미 이 도시의 예술성은 차고 넘친다. 이렇듯 독일의 중요한 문화적 중심으로 여겨지는 바이마르는 관광객들로 넘치는 것 까지는 아닐지라도, 이 도시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이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도시라는 걸 체류기간 내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 나는 노래를 부르러 갔다. 이곳에서의 시간 동안 리허설하고 밥 먹고 공부하고 또 리허설을 하는, 그야말로 내 삶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참 쉽지 않았던 ‘노래만을 생각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할 때면 이 도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름 공원’에 가서 산책을 했다. 물론 도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너른 시야를 확보하면서 아기자기함마저 간직한 벨베데레 궁의 정원도 아름답지만, 나에게는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일름 공원의 평온함이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당시 내 안에 있던 고민과 성취, 그리고 희망은 이 공원이 지닌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름 공원은 괴테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고전시대 스타일의 공원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그저 일반적인 숲 같지만, 깊이 발을 들여놓을수록 그 안의 보물 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고대 로마의 양식과 인테리어로 꾸며진 로마 하우스 안에 들어가 자연을 바라보면 의외의 이국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괴테가 바이마르에 와서 초기 몇 년을 살던 작은 집이 이 공원 안에 소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도 특별하다.



빛이 좋은 날 일름 강에 비치는 구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비가 내린 후 나무들이 지닌 생기로움은 얼마나 큰 치유와 희망의 에너지가 되는지. 괴테가 일름 공원을 산책하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시간 여행하듯 즐겁지만, 내게는 이곳의 산책에서 더욱 현실적인 친구들이 있었다. 바로 나와 이 공원을 나눠 쓰고 있던, 한 줄로 옹기종기 서서 목동을 따라가는 귀여운 양떼들이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몸에 불필요한 힘은 빠지고, 마음엔 평화가 스민다. 그렇게 다시 노래할 힘을 얻는 것이다.



리허설을 쉬는 주말에는 틈틈이 바이마르를 빛낸 대가들의 집을 찾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바이마르와 가장 인연이 깊은 괴테의 집이다. 이곳은 그가 1782년부터 들어와 산 이래로 그의 손자들까지도 이곳에서 살았고, 마지막 손자가 세상을 떠난 1885년 이후 국가 소유의 박물관으로서 세상에 공개하고 있다. 비록 외관은 전쟁 중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되기도 했었지만, 유품은 따로 잘 보관이 되어 있었고, 이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유지가 잘 된 장소다.


나에게는 수많은 고전 및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영감이 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거장으로서 중요한 사람이지만, 사실 괴테는 알려진 대로 하나의 분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인물이다. 1775년,  작센-바이마르 공국을 지배하고 있던 젊은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모후인 안나 아말리아의 추천으로 괴테를 바이마르로 초청한다. 그는 이 정부의 재상으로 활발히 활동을 하면서도 문학, 철학, 과학, 예술 등 한 인간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모든 분야를 탐색하고 꾸준히 글을 썼다.


괴테의 집은 이런 그의 예술적 깊이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소다. 그의 <색채론>에서의 연구결과를 반영하여 보색 효과가 그대로 살아나는 벽면의 색 대비는 물론, 그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조각과 회화 역시 그의 관심사의 폭이 드러나는, 시대를 넘나드는 방대한 컬렉션이다. 특히 괴테의 생산성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서재는 바라보기만 해도 그의 평생을 만나는 것 같은 진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그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역작 <파우스트>가 탄생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게다가 정원 역시 식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세심한 배열이 인상적이다.




근방의 실러의 집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어찌 보면 괴테의 집 보다 사람 손을 덜 타서일까? 당장이라도 주인이 나와 인사할 것 같은 현실적인 인테리어와, 괴테의 집과 마찬가지로 녹색 벽지가 둘러진 서재에서는 멍하니 서서 떠나고 싶지 않은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건 그 주인이 젊은 시절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곳 바이마르에서 괴테와 함께 손잡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탄탄대로를 영위하던 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안타까움 때문 아닐지.



사실 바이마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장소는 바로 프란츠 리스트가 살던 집이다. 리스트의 집에 다녀온다고 하면 동료들은 ‘진정한 음악인’이라며 나를 놀리듯 치켜세웠다. 아니, 바이마르까지 왔는데 어찌 그곳에 관심이 없을 수 있는지? 리스트에게 바이마르라는 지역은 사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너무나 중요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피아노의 젊은 거장으로서 세계를 정복했던 리스트는, 궁정 악장으로서 바이마르에 온 이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이로써 연주자로서는 세계 투어를 자제하게 된 것이기도 했지만 음악가로서는 지경을 넓히게 된 계기가 된 것인데, 그건 당시의 연인 카롤라인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설득에 힘입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공개하는 리스트의 바이마르 집은 그의 궁정악장 시절이 아닌, 말년의 흔적을 담은 별장이다. 아름다운 가구와 장식, 악기들을 바라보자면 그의 음악가로서의 영광과, 개인적인 고독이 한꺼번에 다가온다. 외부적 압력으로 공작부인과의 결혼에 이르지 못하게 됨으로 이곳에 함께 돌아오지 못했으니.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그의 그림과 사진, 다양한 흉상, 데스마스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실제 사이즈로 재현된 그의 오른손 부조. 그의 피아노 작품의 난해함은 작곡가 자신의 크고 긴 손이 지닌 불멸의 테크닉 덕분이지 않은가. 그저 음악이 고플 땐 이 집에 들러 곳곳에 설치된 그의 음원을 종종 듣고 가는 일로 행복을 충전하곤 했다.




바이마르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떠나던 날의 감정을 지금도 잊을  없다.  땅이 지닌 평온하고 든든한 기운 위에서 예술적 자극과 땀과 평안한 휴식이 가장 이상적으로 공존하는 시간을 보냈으니. 무엇보다 끝없이 질문하며 내가 찾던 답을 차근히 모으던  시간은, 괴테의 그것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집념의 섹깔은 조금이나마 닮았는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이나마 물려받은  유산은 대도시의 삶을 감당하면서도  번씩 나를, 내가 하는 일들을 돌아보게 하, 세기의 예술가들의 삶을 담은 깊이와 열정의 산물이다.  


https://youtu.be/YEyCurpqCoY

Gounod-Liszt <Faust-Waltz>: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 부분을 리스트가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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