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도착한 건 어느 겨울과 봄의 경계에 놓인 3월의 한낮이었다. 시린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에다, 넉넉하지 않은 여행 자금으로 파운드의 강세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그럼에도 참 좋았다. 여행은, 누구와 무엇을 겪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삶이 원래 그런 것처럼.
런던에서는 더듬이 미러가 달린 귀여운 2층 버스를 타고 다닌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여행자를 위한 버스가 아닌 일반 버스도 2층으로 된 경우가 많아 당시엔 많이 신기했다. 지금도 버스를 타면 무조건 맨 앞자리가 비었는지를 확인하는 버릇은 이때 처음 생겼는데, 큰 유리창을 앞에 두면 주머니는 가벼워도 마음만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런던은 이렇게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거리를 누비기만 해도 참 멋지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를 둘 다 놓치지 않는 세련된 건축물과 사람들, 그리고 자동차들! 뉴욕에서도 어쩌다 한 대 볼 수 있는 최고급 자동차가 이곳에는 길거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차된 채 늘어서 있다. 그런 가운데 정교하게 조성된 공원으로 유명한 도시인만큼, 하이드 파크를 위시하여 평온한 공원이 곳곳에 있고, 여유 있는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고풍스러운 장소도 많다.
우리는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버킹엄 궁전에 먼저 들러 각국의 여행객들과 함께 근위병 교대식을 보았다. 긴 검은 털모자를 쓰고 붉은 상의의 제복을 입은 그들은 절도 있는 자세로 관악과 타악 앙상블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모든 행위가 상징적일지라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현 영국 왕실의 근엄함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의미가 있다.
아 영국,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의 상징이었으나, 이제 세상은 변하고,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그 역사를 그들의 수도 곳곳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찾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시 일반적인 성당이 아닌, 이 나라의 정치와 종교, 역사와 인물들을 복합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참 드문 장소다. 천 년 넘은 고딕의 웅장함 아래 이루어졌을 수많은 대관식과 주요 인물들의 장례식을 떠올리니, 여기를 거친 이들의 공과 과를 넘어 인간사의 묵직함에 숙연함이 더해진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현재 영국 포함 총 16개 나라의 상징적 왕으로 존재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올려지기도 한 곳이다. 무려 반세기보다 훨씬 전인, 1953년의 일이다. 버킹엄 궁에서 그녀를 직접 볼 수는 없었으나, 대신 기념품 상점에 걸려 있던 그녀의 대관식 사진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25세밖에 되지 않은 앳된 여성은 그의 얼굴보다 더 큰 보랏빛 왕관 아래에서도 전혀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당당함, 그리고 왕위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니 이렇듯 오랜 시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킬 수 있는 것이겠지.
사원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내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건, 영상과 사진 등을 통해 자주 만났던 성가대석의 모습이다. 붉은 성가대복을 입은 소년들 사이로 비추고 있던 붉은 갓을 씌운 등이 지금도 그대로 빛을 밝히고 있는 것이 반갑다. 소년들은 지금 없지만, 아이들의 청아한 화음이 장소를 데워주며 고운 울림으로 맴돌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역사적 인물들의 영광스러운 자리라면, 런던 타워는 이와 대비되는 음습한 기억을 많이 담고 있는 장소다. 정복왕 윌리엄이 11세기에 처음 이 탑을 세울 당시에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감옥으로 쓰인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해설사가 ‘누가 죽고 누가 또 목이 잘려 나가고’ 등의 내용을 반복하는데,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처형 사건 때문인지 까마귀의 울음소리조차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조의를 표한 듯 스산하고 구슬프기만 하다. 다만 이쪽에서 바라보는 템스강의 상징과도 같은 타워 브리지의 모습은 그야말로 웅장함 그 자체다. 런던 역시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애욕의 역사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랜드마크가 차고 넘치는 멋진 정경의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이날의 야경을 템스강변에 위치한 관람차 런던 아이를 타고 바라보기로 한 건 참 잘한 선택이었다. 유럽의 강 중 가장 그럴싸한 멋을 갖춘 템스는 대도시를 관통하는 힘 있는 매력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강변에서 근사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 빅 벤과 국회의사당을 이렇듯 높은 각도에서 바라보자니 반사적으로 피터 팬이 내 눈앞에서 날고 있는 것만 같다. 런던 아이 안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피터 팬과 눈을 맞추니 어린 시절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하고 신기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언제나 저 빅 벤 위에서 한결같겠지? 나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을 순항하고 있는 우리의 지금만큼은 순수하고 반짝거리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다.
다음날에는 런던에서 공연 한 편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동안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런던의 대표적인 실내악 공연장인 위그모어 홀에서 바리톤 올라프 베어의 독창회가 방문 기간 동안 열린다는 사실이 너무 반갑고 기뻤다.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쇤베르크 등의 노래를 한 시간 동안 연주해 주었는데, 고급스러운 목소리와 세련된 표현력은 백 년 넘은 홀의 기품 있는 울림과 하나가 되며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 런던은 역사적으로 공공 연주회의 유행을 선도한 도시로서, 지금까지도 클래식부터 대중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공연예술로 세계의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다. 이날 역시 월요일 낮 시간임에도, 관객석은 높은 집중력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도시의 예술적 수준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런던은 음악뿐 아니라, 여러 박물관을 방문하기에도 참 좋은 문화의 도시다. 물가가 비싼 편임에도, 대부분의 박물관의 입장료가 무료이기에 더욱 누릴 수 있는 것이 많다. 특히 트라팔가 광장의 시원한 분수를 바라보며 입장한 내셔널 갤러리는 유화를 사랑하는 내게 보물 같은 장소다.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은 훌륭한 작품들로 가득한 가운데, 특별히 르네상스 플랑드르의 대표적 화가인 얀 판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은 차분한 그림임에도 세월을 뚫고 자신만의 세세한 이야기로 친밀하게 다가오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는 미의 여신의 '절대적인 미'를 드러내는 감각적인 모습을 내가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선명한 환상을 선물해 준다.
여러 세기를 거친 대가들의 작품을 세세하게 관찰하자면 너무나 시간이 부족한 큰 규모의 내셔널 갤러리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건축가인 존 손 경의 집 자체가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어서 흥미로운 마음으로 방문해 보았다. 이곳은 손 경이 직접 지은 건물로, 신고전주의라고 할 수 있는 조지안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볼 수 있기도 하면서, 각 방마다 가득한 손 경의 소중한 예술 컬렉션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어찌 보면 관람객 입장에서는 큰 박물관보다 훨씬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다. 구석구석 살피며 그가 건물 안으로 자연광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각 방에서 직선과 곡선을 서로 다르게 조합함은 물론, 시대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도록 한 디자인에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마치 영화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존 손 경이 모은 수많은 예술작품 중 호가스의 <난봉꾼의 행각> 연작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될 정도로 좋았다. 18세기 초반의 풍속화를 보는 느낌이랄지. 한 사람이 타락해 가는 모습과 그림 안에 포함된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그들을 받쳐 주는 배경을 보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추측해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런던에 도착한 이래로 왕가의 역사만 계속 추적하다, 어느 순간 귀족과 평민의 삶도 경험해보는 느낌이랄지.
그날 저녁, 우리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케밥으로 저녁을 해결한 후, 음료수를 한 병들고 2층 버스의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런던을 한 바퀴 돌면서 그 모든 분위기를 잊을 새라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었다. 지금은 청바지에 패딩을 걸치고 편안하게 돌아다니고 있지만, 다음에는 말쑥한 차림에 세련된 표정으로 다녀보고 싶기도 한 런던의 거리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지금의 자유로움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런던의 골목 사이사이에는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기억이 구석구석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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