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마트폰 속에 가끔 생각나는 대로 넣어 둔 글감들이 있다. 그 안에서 이런 글을 발겼고 했다. ‘장마인가, 거센 바람만 쏟아져 내린다. 그런 중에 꽤나 시원함을 느꼈다. 비도 내리지 않던 이런 아침에 공원을 걸으러 나갔어야 했다고 느꼈다. 문득 걷다가 뛰면서 숨이 차 올라 몸이 조여 오는 느낌을 떠올렸다.’ 제주여행을 다녀와 7월쯤 썼던 문장 같다. 이런 글을 왜 무슨 생각으로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여름을 지나 가을이다.
푸르렀던 나무들 사이사이에 울긋불긋 색들을 뒤집어쓰고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이제 가을이 오려나 보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 빼꼼히 들어내던 색들이 무성해져서 푸른빛을 꽤 많이도 삼켜 버렸다. 이제는 붉은빛이, 또 노란빛이 나무 틈에 더 많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느덧 10월이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아직은 몇 달의 구멍이 남은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과연 어떤 나무였을까? 평소보다 꽤 많은 책을 읽어낸 자랑스러움 초록색, 꾸준히 글을 쓰고 기록하는 당당함 하늘색, 여전히 꽃을 좋아하는 사랑스러움 연보라색, 집을 단정히 가꾸는 마음 살구색,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고 싶은 엄마의 다정함 노란색 아쉬움으로 남겨진 연한 갈색까지. 나도 이 계절의 나를 돌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색을 품고 있는 나무였구나.
나는 늘 그랬다. 10월이 찾아오면 꼭 올해가 다 지나간 것 마냥 다음 해를 준비한다. 일 년을 다 채우지 못했던 나의 새해 다이어리는 꼭 10월 자락을 붙들고 시작했다. ‘왜 꼭 10월이었을까?’ 난 누구보다 그 겨울을 싫어한다. 왜 인지는 몰라도 차갑고 시린 그 계절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 계절이 오기 전에 나는 늘 새해를 준비했다. 외면이라도 하듯 그렇게 가을이 끝날 것 같으면 다음 해를 준비하고 새해가 되면 꾸준히도 봄을 기다린다. 유난히도 봄을 기다린다.
얼마 전 뒤늦게 본 ‘나의 해방 일지’ 속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 사람‘이래, ’이 사람‘, ‘그 사람’하고 ‘이 사람’하곤 상당한 거리가 있다? 여기 없는데 ‘이 사람’이래 여기 있다는 거지“라며 미정의 직장동료가 미정의 가슴을 향해 손에 대며 말한다. 그때 알았다. 나의 겨울은 늘 그 겨울이었음을! 봄, 여름, 가을은 늘 이 계절이었는데 겨울은 항상 그 계절이었다. 내 마음에 없는 계절처럼 지냈다.
겨울을 싫어하면서도 나는 어떻게 어떻게 아무도 모를 인생 중간 즈음에 경기북부 ‘양주’에 자리를 잡았다. 첫해도 추웠고,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여전히 겨울이 가장 긴 이 동네에서 나는 꾸준히 겨울을 외면하며 살았다. 문득 다시 새해를 준비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아! 곧 겨울이 오겠구나.’싶은 마음이 가득 채워져 무섭기까지 하다. 이 추운 계절, 이 겨울 왕국에서 나는 또 얼마나 봄을 기다리며 지내고 있을까!’ 하지만 그런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난 이 계절의 모습을 충분히 느낀다. ‘아직은 가을이야, 아직은 날씨가 꽤 좋은 가을이야. 하늘도 참 예쁜 가을이야!’
겨울이 오기도 전에 호들갑을 떨고 있는 분주한 내 마음이 마냥 우습다. 피한다고 안 추운 것도 아니고, 눈이 안 내릴 것도 아닌데 그 사이에서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괜한 기도를 꺼내 본다. “올겨울은 좀 덜 추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그곳은 좀 따뜻한가요?”라는 안부를 묻곤 한다. 그 뒤에 내 진심은 숨긴 채. “아직, 이곳은 너무 춥거든요…”
이런 마음을 숨기려 하다 보니 얄밉던 겨울이 유난히도 싫어진 것은 아닐까, 미웠던 모습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 새해의 목표는 <기록하기>로 정했다. 새해에 열심히 4개월로 끝나 버린 가계부도, 중간중간 이 빠진 모습으로 너덜 해진 다이어리도, 언제부턴가 소홀해진 브런치도 그리고 눈앞에 미뤄놓은 독서노트도 생각해 보니 그 겨울, 새해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어버렸다.
기록하는 매일 속에서 다시 찾아 올겨울의 또 다른 면을 하나쯤은 발 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유난히도 겨울이 긴 이곳의 나를 매일을 기록하면 나름의 겨울을 즐기는 날이 혹시나 찾아 오진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마주하기를 선택했다. 사실 언제 다시 그 추위에 놀라 두 손을 털고 포기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눈이 보이진 않아도 단단히 동여맨 매듭처럼 안전 무장한 채로 나는 두 눈을 질 끌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