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서 정말 기뻐”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아이는 존재감을 상실하고 자신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심각한 불안감을 초래하기도 한다. (엄마의 상처 떠나보내기, 42쪽)
정말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내가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혼자서 반문했다. 이제 엄마는 떠나고 없는데......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나는 책을 읽어내려갔다.
내가 새로 참여하게 된 책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심리학책을 읽는 모임이다. 60을 넘어선 네 명의 여자들은 오전에 만나서 특정 장소를 구경하고 오후에 모여 앉아 책을 읽은 소회를 나눈다.
초록이 싱싱한 봄날에 우리는 청와대 구경을 했다. 북악산 아래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청와대 숲속을 걸어가면서 마음이 맑아졌고 기와지붕 위로 얼굴을 내민 소나무를 바라보며 청와대가 단아하게 잘 꾸며졌다고 생각했다. 청와대 안에는 그동안 안주인 역할을 했던 영부인들의 사진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서 자녀를 키웠을지? 궁금했다.
점심을 먹고 찻집에 앉았다. 나는 책을 읽던 내내 마음에 걸렸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어릴 적에 논에 간다고 날 떼어놓는 엄마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던 기억이 생생해요. 날 버리는 것 같고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었었는데......”
나는 지금도 여섯 살이던 그날처럼, 어머니의 돌팔매질과 올레 저기로 멀어지던 어머니의 뒷모습과 까만 신작로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동네 아저씨의 넓은 등과 자전거의 덜컹거림, 드디어 논에서 일하는 엄마와의 상봉에 안도하던 기억까지.
내 말을 이어 ㅂ샘이 말을 받았다.
“샘이 그 말 하니까, 울 오빠랑 엄마가 말싸움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릴 때 엄마가 집에 없어 힘들었었다고 오빠가 성을 내니까 엄마가 내가 못한 게 뭐냐? 고 울분을 토했었지요. 사실 엄마가 가정 경제를 꾸리느라 집에 붙어있을 수 없었거든요.”
얘기를 듣던 ㅌ샘이 말했다.
“196~70년대 당시엔 밥 굶기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던 때가 아니던가요? 저는 엄마를 대신해 맏딸로서 동생들을 늘 챙겼어요. 한 번도 싫은 내색 없는 나를 엄마는 어질다고 하셨죠...... ”
그렇구나. 맞다. 그 옛날 엄마들은 자식을 여섯 정도는 낳았으니까, 집안일과 밭일도 해야 하고 아이들까지 먹이고 입히고 키우느라 정신없었겠지. 그러니 ‘네가 있어서 정말 기뻐!’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나만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이 결핍된 게 아니었구나. 다들 그랬구나. 그런 말을 들으니 슬며시 위로가 되었다.
ㅇ샘이 말없이 듣다가 자신은 엄마로서 자녀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주말부부로 남편과 맞벌이를 하던 때, 너무나 힘이 들어 어린 딸애와 같이 놀아주지 못했단다. 등에 매달리던 아이를 밀쳐내었을 때, 자기를 바라보던 아이의 눈망울이 기억에 선하다고.
그랬었다. 내 나이 40이 가까웠을 때, 나는 답답함과 절망에 시달렸다. 학교에서 정신없이 일에 빠져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밥해서 먹이고 아이의 숙제까지, 챙겨야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시어머니가 있는 집과 학교, 그 어느 곳도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어느 것 하나 실수하거나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고 자신을 닦달하다 보니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그런 나를 두고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전투하듯 사냐?’ 고.
그 탓이었을까?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던 큰딸과 심하게 부딪치던 날이었다. 내가 딸에게 널 키워준다고 시어머니가 들어와서 살게 되었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들이었다고 쏟아부었다. 그 말에 이어진 딸의 대답에 내가 꿇어앉아서 잘못을 빌었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혼낼 때마다 ‘또 파도가 치는구나’하고 생각했어.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엄마가 힘들 때마다 나를 혼내는 게 아닌가? 하고. 8살 아이가 뭘 얼마나 잘못했겠어? 그렇게 느꼈다는 건...... 폭력 아니야?”
내가 ㅇ샘에게 대답했다.
“저의 경우는 큰딸에게 미안하다고 울며 사과하고 나서 관계가 좋아졌어요. 마음에 걸리시면 사과하시고 풀어버리세요.”
ㅌ샘이 자신은 둘째인 아들을 과보호한 탓에 성인이 된 아들이 자꾸 자기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며 또 다른 위로를 건넸다.
“요즘 맞벌이 부부와는 달리 우리 때엔 육아가 전적으로 엄마 손에 달렸었잖아요. 직장 다니랴 육아하랴 다들 힘들어서 아이에게 온전히 관심과 사랑을 쏟을 정신이 있었나요? 책에 나오듯이 그렇게 아이를 대할 시간도 심리적인 여유도 없었으니까......”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청와대의 안주인인들 쉬웠을까요? 다 가진 것 같아도 자식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자식 키우는 것은 쉽게 자신할 수 없는 노릇인 것 같다. 3~40대, 자신도 완성되지 않는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기를지, 다 터득될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그저 생존 자체로 힘들었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의 상처를 이제는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6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그와 동시에 나는 핸드폰을 들고 멀리 있는 큰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와대 사진과 함께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