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은 나중에 할게, 일단 타!' 같은 판타지
내 철없음에는 판타지가 크게 기여한다. 나니아 연대기 같은 아예 허구의 것들로만 가득찬 판타지 말고, 일상이 배경인데 있을 수 없는 사건 같은 것 말이다. 퇴근하려고 회사 건물 밖을 나오자 내 앞에 승합차가 끼익하고 급정차하더니, 문이 벌컥 열리면서 처음 보는 조합의 친구들이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타!' 라고 외치는 판타지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이 시나리오의 키 포인트는 처음 보는 조합의 친구들, 그리고 설명할 시간 없이 급한 상태다. 고등학교 친구, 군대 동기, 회사 사람 같이 서로는 거의 알지 못할 것 같은 그룹에서 한 명씩 차출돼서 그 승합차 안에 같이 타고 있는 그런 상태도 사실상 판타지고, 다짜고짜 차 안에 태우는 그런 상태도 판타지다. 그치만 사자나 마녀가 등장할 정도로 허무맹랑하진 않았으면 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대체로 현실적인 면모로 XSXX을 오가는 내가 간혹 N의 면모를 띤다면 바로 이런 순간이다.(한동안 ISFP가 나왔다가, 회사를 바꾸고 ESTJ가 되었다) 가끔 내게 진짜로 벌어졌으면 하는 가벼운 판타지를 떠올린다. 내가 정말 찍어보고 싶은 연출사진도 이런 맥락에 가깝다. 텅 빈 실내 공간에 허수아비 분장을 한 사람이 차가운 조명을 받고 파닥에 철푸덕 앉아있는 상태를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찍는다던지, 아니면 빛이 잘 들어오는 창 넓은 카페에 청바지 차림의여자가 벤치처럼 긴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괴고 노트북을 하고있는데 그 의자가 긴 케이크라던지, 정장과 턱시도 차림을 한 백인 남성 여럿이 천장에 매달린 조명 하나만 있는 어두운 스탠딩 바에서 담배를 피면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데 그 테이블이 자전거 안장이라던지. 글로 적으려니까 설명이 길어지지만 현실에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면 혼자 드릉드릉할 정도로 진심이다. 따지고 보면 현실에 존재하는 판타지와 버킷리스트는 거의 비슷하다. 둘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시나리오인데 단지 판타지를 실천에 옮겼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더 격하고 재밌어하는 정도의 차이랄까? 이런 판타지를 만드는 과정도 물론 아주 신나고 흥미진진하지만, 나는 늘 그 판타지 속에 들어가보고픈 로망 비슷한 게 있다.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 몰라도 마법처럼 홀려들어가는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었다. 앨리스도 그렇고 해리포터도 그렇고, 시작은 항상 평범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더 대단한 것들이 펼쳐지곤 하니까. 내가 맞이하게 될 더 큰 판타지들을 상상하면서 그 시간을 보내면 너무 신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전 망원동 어떤 상점에서 그런 순간을 만났다. 해리랑 밥을 먹고 초콜릿을 사러가려다가 어느 상점에 문이 열려있어서 그냥 들어가봤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 가봤던 상점이라 특별한 기대도 없었다. 빈티지 상점이라 굉장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았는데, 가게 벽과 물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종이엔 가게와 물건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과 함께 제발 말을 걸어달라던 간곡한(?) 가게 주인분의 요청이 적혀있었다. 평소에 말을 걸어오는 직원분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지만 이번만큼은 용기내어 어떤 컵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사장님께 여쭈었다. 사실 포토샵으로 무언가를 뚱땅뚱땅 작업하고 계시던 터라 방해했을까봐 조금 걱정도 들었었다. 막상 여쭙고 나자마자 걱정의 쓸데없음을 느꼈는데, 정말 차분하지만 환영하는 말투로 카니발 글라스와 디프레션 글라스의 유래, 물건의 전 주인, 가게의 이야기까지 술술 쏟아내셨다. 얼마나 신나게 쏟아내시던지 오늘 말을 처음 하시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회종 시계를 직접 꺼내서 돌아가는 소리도 들려주셨고, 도자기 이스터에그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다음 퀘스트처럼 사장님께서 만든 15분 짜리 소개 영상도 보시겠냐길래 우린 더 적극적으로 보여달라고 했다. 15분 짜리 영상의 내용은 덴버로 이민 가신 사장님 가족의 이야기와 가라지 세일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우리는 처음 가려했던 초콜릿 가게를 포기할 정도로 영상에 빠져들었다. 영상마저 다 보고서 너무너무 재밌게 봤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는데, 사장님이 오픈 준비 중인 2층을 보고 가겠냐는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을 하셨다. 그리고 흔쾌히 수락한 우리는 보물로 가득찬 비밀 공간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다. 아직 1층에 꺼내두지 않으신 수많은 빈티지 물건들로 채워진 공간이었는데, 그 공간들을 여러 개의 테마로 나누어진 판타지스러운 공간이었다.
우린 말 그대로 그 공간을 '탐험'했다. 그리고 사장님은 그 비밀 공간의 NPC 같았다. 그 공간의 테마에 따른 이야기를 듣는 재미와 이야기를 간직한 물건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나는 이런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신기하고 즐거웠다. 말을 걸어달라던 NPC의 메시지를 보고 우리가 말을 걸었고, NPC와 신나게 대화를 나누니 보상으로 숨겨진 비밀 공간이 오픈된 것 같았다. 딱 내가 생각하는 일상 속 판타지 그대로였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들이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었는데, 나도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순간이 꿈을 꾸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판타지와 낭만을 철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찰나에 다시 그 즐거움을 깨달았다. 지난 주에 나는 망원동에서 판타지를 만났다.
그 공간을 오픈하게 되면 같은 색깔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처럼 운영하신다고 한다. 그 공간에 다녀온 이후로 난 그 커뮤니티에 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 살롱의 '후원자'가 되는 것은 단순히 빈티지 물건을 사고 공간을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그 이야기과 얼마 남지 않은 판타지에 함께하게 되는 걸 의미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판타지의 일원이 되는 즐거움은 나에게 아주 큰 즐거움이기 때문에, 기꺼이 내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