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포스> 나카무라 유지로와 가스통 바슐라르의 장소를 그리며
몸이 아프던 어느 겨울날,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얀 풍경은 선명했지만 그녀는 몸의 통증 때문에 그곳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이 자리와 창 너머 하얀 세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경계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그것을 ‘토포스’라 부른다.
공간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어떤 말보다도 깊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 문턱에 앉아 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책을 읽지도, 무언가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었다. 문턱의 차가운 감촉과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종이 냄새, 아버지의 숨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 그것은 그녀의 몸에 새겨진 최초의 토포스였을까.
가끔은 그런 자리에 멈춰 선다.
어느 벤치, 어느 골목, 어느 문턱.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고,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는다.
공간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무언은, 어떤 문장보다 완성된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흔히 ‘있다’라는 말을 가볍게 사용한다. 나는 여기 있다. 너는 거기 있다. 그러나 진정한 ‘있음’은 단순한 위치의 문제가 아니다.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가 말했듯, 토포스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깃듦’이다.
이 땅에 발을 딛는 행위가 곧 사유이고 감각이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울림이라는 사실. 사람들은 그것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아가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그분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그 문턱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다 비 오는 날,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간이 멈춘 듯한 공기, 어머니의 체온이 남아있는 이불, 창가에 놓인 반쯤 마른 식물.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감쌌다.
그때 그녀는 알았다. 어머니는 떠났지만, 이 방의 토포스 속에 여전히 ‘깃들어’ 계신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다.
아주 천천히.
한 걸음, 또 한 걸음.
햇빛이 바래고, 시간은 묵직하다.
그곳엔 말이 없지만, 기척이 있다.
살아 있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
담벼락의 페인트는 벗겨지고,
작은 화분 하나가 마르고,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있다.
인간의 삶은 토포스와 토포스 사이의 여행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한 층 한 층 내려가는 여정에 가깝다.
어떤 토포스는 사람을 안아준다. 어린 시절의 이불처럼, 첫사랑의 손길처럼. 또 어떤 토포스는 사람을 밀어낸다. 병원의 냄새처럼, 이별했던 역의 플랫폼처럼.
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든 토포스들이 만들어내는 리듬 속에서 춤을 춘다.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아름답게.
그 리듬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속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다.
그리고 그녀를 감싸고, 그녀를 들어 올린다.
그 순간, 그녀는 ‘있다’는 감각과 만난다.
이곳에, 이 자리에, 지금.
단지 존재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깃든다는 감각.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모든 공간은 기억의 응결이며, 시적인 상상력은 그 안에 눕는 행위라고 했다.
어린 시절의 방, 어머니의 주방, 첫 이별 후의 정류장, 비 오는 날 찾았던 헌책방. 그 모든 장소들이 그녀를 만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그 장소들 속에서 탄생했고, 성장했고, 때로는 부서졌다.
그곳들에선 언제나 침묵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감정은 사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문고리, 창틀, 먼지 쌓인 의자. 그 사물들이 지닌 ‘무게 없는 무게’가 그녀의 삶에 비문처럼 남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녀는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건들? 감정들? 관계들? 아니다. 인간의 삶은 토포스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깃들었던, 그리고 사람들을 품어주었던 모든 장소들.
그 장소들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었다. 때로는 너무 좁아서 아프고, 때로는 너무 넓어서 외로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고, 사랑을 나누었다.
나카무라의 토포스는 바슐라르의 공간들과 만나 이야기를 건넨다. 그 이야기는 철학도 시도 아니고, 그저 살아 있는 목소리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어디에 깃들어 있는가.
매일 지나치는 길,
무심히 앉았던 자리,
무언가를 잃고 다시 찾게 되는 그 한 조각의 공간.
그곳은 말하진 않지만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으로, 온기로,
그리고 당신이라는 리듬으로.
그녀가 아팠을 때, 한 친구가 찾아와 창가에 작은 화분을 놓아주었다. 그는 말했다. “너의 아픔이 이 식물의 자라남과 함께 사라지길.” 그녀는 그때 이해하지 못했다. 식물과 자신의 아픔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깨달았다. 그 화분이 놓인 창가가 하나의 토포스가 되었음을. 매일 아침 물을 주고, 햇빛이 비칠 때마다 창을 열고, 잎이 자랄 때마다 기뻐하는 일상이 쌓이며, 그 자리는 치유의 장소가 되었다.
토포스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다정하게 붙들고 싶은 작은 시간, 작은 공간, 작은 감정의 자리다.
그러니 오늘 하루,
한 걸음 늦춰,
한 자락 조용히 귀 기울이자.
당신이 잊고 있던 ‘장소의 언어’가
어쩌면 지금
당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있을지 모르니.
때로는 무심히 지나친 골목 하나,
손끝으로 스치듯 만진 오래된 벽 하나가
사람의 온 존재를 깨우는 순간이 있다.
그때 당신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공명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토포스를 향해 걷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정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아있음의 의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