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맥루한의 시선
그대는 오늘 아침,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가.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빛의 결, 스마트폰 화면에 반사된 너의 얼굴,
혹은 아무 말 없이 켜둔 음악 속에서 무심히 흐르는 단어 하나.
그 모든 것이 ‘세계’의 형상이자, ‘매체’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이제, 감히 말해보자.
우리는 더 이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에 둘러싸인 세계를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거대한 화면들 속에서, 작은 자판의 리듬 속에서,
우리는 감각의 방향을 잃고, 지각의 깊이를 잃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존재’다.
맥루언은 말했다.
“모든 매체는 인간 감각의 확장이다.”
그러나 그 확장은 결코 단순한 확대가 아니다.
감각의 한 축이 과잉되면, 다른 한 축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화면이 커질수록, 사물의 향기는 멀어지고,
속도가 빨라질수록, 관계의 숨결은 얇아진다.
그래서 묻고 싶다.
그 확장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보지 못한 채, 이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기술을 ‘은폐된 것의 해명’이라 했다.
기술은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그러나, 기술은 어느 순간부터
‘드러냄’이 아니라 ‘숨김’을 시작했고,
‘연결’이 아니라 ‘차단’을,
‘현존재’를 비추기보다 ‘부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디지털의 망은 촘촘하고, 그물은 세다.
우리는 그 안에 걸려 있는가, 아니면 그 안을 유영하는가?
‘기술적 눈(technical gaze)’으로 무장된 우리의 시선은
더 넓고, 더 정밀하지만,
정작 ‘본다는 것’의 깊이를 앗아갔다.
이미지는 넘치고, 서사는 사라졌으며,
촉각은 표피에 머물고, 깊은 감정은 번역되지 못한 채 증발한다.
그런데 여기서,
공간은 여전히 말이 없다.
침묵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대가 앉은 의자, 지나온 길목, 익숙한 방의 모서리.
이 모든 것은 인간, 기술, 세계의 삼중적 관계가 만들어낸
하나의 응축된 시간, 하나의 감각의 장이다.
그렇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기입장이자, 존재의 행간이며,
기술이 실현되는 구체적 흔적이다.
그대가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누르는 찰나,
공간은 변형된다.
그대가 화면을 스치듯 넘길 때,
하나의 장소성이 생성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새로운 실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이 시대의 공간디자인은, 과연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인터랙션이나 시각적 효과,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공간디자인은 인간의 감정과 기억,
기술의 윤리성과 방향성,
세계와의 긴밀한 연대를 꿰뚫는 사유의 틀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감각하게 하고,
관계를 재배열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운동’이다.
기술이 빚어낸 소외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감각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공간은 그 감각을 다시 ‘깊이 있게’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촘촘한 통로다.
이제, 그대는 무엇을 디자인할 것인가?
무엇을 다시 구성하고,
무엇에 대해 연대할 것인가?
나는 믿는다.
공간디자인이 매체를 성찰하는 가장 예민한 촉수이며,
삶의 결을 회복하는 가장 실제적인 연대의 기술이라고.
그리고 이 기술은,
화려함이 아니라 섬세함에서,
속도가 아니라 리듬에서,
효율이 아니라 정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기계와 인간의 협연 속에서
더 촘촘하고 따뜻한 감각이 살아날 것이다.
그대의 손끝에서,
그대의 시선에서,
그리고 그대가 다시 살아낸
공간의 조용한 재구성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