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묘해 Oct 04. 2022

텅 빈 냉장고에 마음이 채워진다

꽉 찬 냉장고를 싫어한다. 이 많은 걸 다 먹을 수나 있는지 아님 이미 상해버려서 못 먹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냉장고 안에는 약(약을 냉장고에 보관해도 되나?)과 고기, 달걀, 얼마의 음료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끔씩 본 집이나 언니 집에 가서 반찬거리를 받아오기도 하는데 그것도 딱 한두 번 먹을 정도 외에는 받아오지 않는다. 평소에 밥을 잘해서 먹지도 않고 먹어봐야 배달음식으로 그때 한 번 먹고 바로 다 치워버리기 때문에 반찬거리도 딱히 필요가 없다. 거기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반찬 냄새라든지 뭔가 냄새가 나면 숨이 턱턱 막힌다.



주말 내내 청소를 했다. 계절이 변함에 옷가지들을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 대청소, 대정리로 바뀌었다. 옷장 가득한 옷들을 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언제 이만큼이나 사다 모은 건지 제대로 입지도 않은 옷들이 가득했다.

천천히 하나씩 정리하자 마음을 먹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옷을 분류했다.


손이 안가 입지 않는 옷, 작아진 옷, 유행이 지나버린 옷 등등 여러 갈래로 옷들을 나누고 버릴 것은 버리는 모둠으로 나눌 것은 나눔 모둠으로 옷들을 분리했다. 한 달 뒤쯤 겨울 코트를 본 집에서 가져오려면 옷장에 여분의 공간을 남겨둬야 해서 옷가지 정리를 꼬박 이틀 동안 하였다. 잘 입지 않지만 아까운 옷들은 그대로 옷장에 두었는데 그 옷들마저 나눔 모둠으로 과감히 옮기니 옷장에 빈 공간이 많이 보였다. 턱턱 막히던 숨이 드디어 쉬어진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를 않아 물건 정리를 하였다. 그러면서 또 사겠지만 그렇더라고 주기적인 정리는 꼭 필요하였다.


사무실 책상은 항상 깨끗하다. 너저분하게 물건을 전시하지도 책꽂이에 자료가 넘쳐나 책위에 자료를 쌓아두지도 않는다. (책 위에 책 쌓기는 정말 병적으로 싫어한다.) 모든 자료는 필요한 만큼만 책꽂이에 가지런히 키를 맞추고 발행연도까지 맞추어 꽂아둔다. 이렇게 정리를 해두면 필요한 자료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출근을 하면 티슈로 책상 위 키보드, 마우스 등등 닦을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닦고 물건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항상 그 물건을 두고 심지어 연필 한 자루에도 네임표를 붙여둔다. 책상 위 물건들마다 네임표를 붙여두어 내 물건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있는 법도 다른 이의 물건이 내 책상에 있는 법도 없다.

한 번은 연필을 다른 이의 자리에 두고 온 적이 있는데 네임표 덕분에 나에게 돌아왔다.


냉장고 문을 열면 남아있는 달걀 수와 음료수 그리고 비어있는 여유 공간, 옷장을 열면 셔츠류 바지류 니트류 재킷류 등 구분되어있는 옷장 그리고 곧 겨울 코트에 자리를 내어줄 공간, 사무실에 출근하면 항상 제자리에 있는 물건들, 창문 사이로 햇빛이 비쳐도 먼지가 끼지 않은 모니터와 거울 그리고 쌓아둔 물건이 없는 깨끗하고 가지런한 책상...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그리고 여분의 빈 공간이 남아 있다.


꽉 채우지 않고 정리가 된 자리에는 허투루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먹지 않을 음식들, 남을 음식들을 함부로 사오지도 남기지도 않고  이번 계절에 입을 옷들이 한눈에 보이면 비슷하거나 필요 없는 옷가지들을 더 이상 사지 않는다. 사무실 자리가 병적으로 깨끗하면 다른 이들이 함부로 자기네 물건을 두지도 자리에 앉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에도 자리와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을 분류하여 공간 안에 넣어둔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사람 목록에, 아는 사람은 그냥 지인 목록에 그 외 직장동료. 이렇게 목록을 만들어 각자의 공간에 넣어두고 넘어옴도 넘어감도 허락지 않는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그들의 많은 것들을 느끼려 노력하고 기꺼이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지만 그 외의 아는 지인 특히 직장 동료에 대해서는 딱 그만큼의 크기만큼만 다가가고 다가오기를 바란다.


'이 옷은 뭐야? 새로 산거야?' (며칠 전에도 입은 옷이다.)

'머리 했네? 저번이랑 스타일이 다른데?' (한 달 전에 머리 했다.)

'오늘 얼굴이 좀 부었네. 어젯밤에 야식 먹었어?' (꼭 굳이 아는 체해야 하나?)

'보기보다 연식이 되었네?' (지금 자동차 얘기죠?)

실상은 변화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의례 하는 말이 대부분이고 친한 척 관심 있는 척... 척척 하는 이들은 결국 다른 이유나 목적이 있더라. 직장이라면 이런 척은 일적인 부탁으로 다가오기 일쑤이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관심 없어요. 그러니 당신도 개인적인 관심은 꺼주세요. 그냥 일만 하자고요.'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있는 마냥 행동을 하고 거리두기를 한다.


다가옴을 허락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그 선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만큼 그들이 살아내 온 시간이 치열했음을 그리고 처절하였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나의 어느 선까지가 한계인지 어느 부분까지 열어둘 수 있는지 경계선을 분명히 알고 그 안으로의 침범을 허락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그 선을 분명히 그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 분명함은 그동안 살아온 흔적이고 그 흔적이 진한 만큼 삶이 치열했음을 말해준다.


나의 선이 분명하고 진한만큼 상대방의 선도 분명하여 그 성안으로 초대해주지 않은 이상 함부로 들어감이 없이 공간을 비워두고 두 팔 벌린 크기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그 정도의 공간은 비워두어야 숨이 막히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지며 다른 것들을 채울 수 있다.

내가 이러하듯 내 주위의 사람들 또한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여 각자의 취향과 다름을 인정하고 가끔은 그 마음까지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쉴 공간이 있음으로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면 가끔은 서로를 보듬어 주기를 바란다.


한 번은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안에 손목시계가 있더라. 응? 놓을 자리에 항상 물건을 놓아두는데...

냉장고에 빈 공간이 너무 많나?


가을비 내려와...(우산도 없이)

글. 그림 by 묘해

(그렇다고 냉장고를 그리지는 않겠어요)


이전 06화 예의에도 이자가 붙으면 좋겠다. 그것도 복리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