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묘해 Sep 20. 2022

예의에도 이자가 붙으면 좋겠다.
그것도 복리도...

대학병원에 정기검진을 받는 날이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즉 오늘 출근을 안 한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오늘 하루는 성공한 것이고 보람차고 행복한 하루이다. 그 어떤 것도 어떤 상황도 내 기분을 망치지 못할 것이니...) 오전 9시 30분 예약인데 병원에 도착하니 9시였다. 병원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인 혈압을 측정하고 (66, 110 간신히 정상혈압 완료) 자리에 앉아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남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60대 정도의 깔끔한 신사분이 접수대에 있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다음 병원 예약시간이 문제인 듯하였다. 깔끔한 신사분은 그 시간에 올 수 없다고 계속 얘기를 했는데 올 수 없는 시간으로 예약을 잡아주어 두 분이 언쟁을 높이는 중이었다. 더 자세히 들어보니 9시 40분에 예약을 해주었는데 더 앞 시간으로 당겨달라는 말이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9시 10분이었다. 언쟁이 붙은 두 분은 오늘 하루를 9시 10분부터 망쳐버렸다. 언쟁은 계속되었고 고성이 오가는 사이 병원 안에 있는 사람들도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이 내뿜는 흑갈색의 아우라가 병원 사람들을 덮치고 있었다. 결국 간호사 선생님은 9시 20분으로 시간을 변경하여 예약을 해주었다. 그러자 신사분은 예약인원이 다 차서 변경이 불가능하다더니 어떻게 변경을 해주는 것이냐 처음부터 가능했던 것 아니냐, 왜 당신네들은 환자의 사정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당신네들 편한 대로만 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급기야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남자들도 등장하였다.


이쯤 되니 60대의 깔끔한 신사분이 더 이상 신사분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학병원이다 보니 환자가 많은 것도 당연하고 본인이 원하는 시간대로 예약을 못 잡을 수도 있는 것이고 본인의 사정이 여차 저차 해서 이러쿵저러쿵하니 다시 한번 살펴봐달라 그리고 변경이 되었음 고맙다... 면 끝날 일인데 이른 아침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고집불통 아저씨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왜 9시 20분이냐 9시로 변경하라고 다시 소리를 질렀고 간호사 선생님은 첫 진료가 9시 20분이라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다른 교수들도 9시 20분이냐 확실하냐 교수마다 첫 진료 시간이 다르다고? 당신 말은 못 믿겠다. 내가 다 확인해 볼 것이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냐... 선을 넘고야 말았고 옆에서 지켜보던 보안요원은 그분을 말리고 또 계속 지켜보고 있던 다른 신사분이 그분을 말렸는데(다들 불편해한다. 여기 있는 분들은 다들 환자분이다. 언성을 낮춰야 하지 않겠나.. 어르신들도 많이 계신다.. 등등) 이제는 말리는 그분한테도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당신이 뭔데 끼어드는 것이냐... 시전...


이쯤에 이름이 호명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잘 지내셨어요.

교수)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나)    교수님 밖에 싸워요.

교수) 그러네. 시끄럽더라고. 왜 싸우는데?

나)    환자분 원하는 시간대에 예약이 안되었나 봐요. 환자분인지 환자 가족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수) ... 에효...

나)    ... 에효...

짧은 인사 후 진료를 하였고 석 달간 어떻게 지냈는지 몸은 좀 어떠했는지... 석 달 전에 처방한 약은 어떠했는지 등등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 결론은 스트레스네... 원인도 스트레스야... 스트레스를 안 받아야 해.

나)    스트레스 안 받으려면 직장을 그만 두면 돼요.

교수) 그만둘 수는 없잖아. 

나)    그러니 스트레스를 계속 받죠.

교수) 그러게.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되는데.

나)    그럼 직장을 그만 두면 돼요.

교수) 그만둘 수는 없잖아.

나)    그러니 스트레스를 계속 받죠.

교수) 어?

나)    어?

(우리 교수님 신경학적으로 명의이시다. 대화 내용이 좀 이상하지만 명의이시다. TV 프로그램 '명의'에도 출연하셔서 뇌졸중에 관해 얘기도 하셨던 아주아주 유능한 분이시다.)

잠시 웃고 석 달 후에 다시 보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진료실을 나왔고 그 새 밖의 상황은 정리된 듯 보였다. 다음 예약 날짜를 잡으며 오전에 언쟁이 있었던 간호사 선생님을 슬쩍 보았다. 얼굴 표정이 좋지가 않다.


병원을 나오는 길에 빵집을 들러 쿠키를 사고 다시 병원에 갔다. 간호사 선생님에게 다가갔고 그분은 여전히 정신없이 환자분과 환자 가족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 옆에 물끄러미 서 있으니 그분이 나를 쳐다보았고 지금이 기회다 싶어 쿠키를 드렸다.

"선생님 아침에 많이 언짢으셨죠... 기운 내세요. 오늘 하루 금방 갈 거예요. 쿠키인데 다 같이 나눠 드세요. 파이팅!"(양손 주먹 꽉 움켜쥐기와 함께)

아... 가벼운 쿠키와 가벼운 인사말인데 간호사 선생님의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양손 주먹까지는 너무 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뭔가를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님도 연신 고맙다며 빨간 눈으로 활짝 웃으셨다.


정당한 것은 정당하다 말하면 된다.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하면 된다. 정당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것에서는 용기 내어 정당하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그 사이의 간격... 정당함과 정당하지 못함. 옳은 것과 그른 것. 뭔가 피해를 보는 것만 같은 얄궂은 느낌. 이 간격에는 나와 상대방의 사정이라는 게 있다. 그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이 소통이고 이해이며 그 결과는 서로에 대한 '예의'로 비친다. 내가 먼저이든 상대방이 먼저이든 한쪽이 예의를 지키면 웬만해서는 다른 쪽도 예의를 다해 표현을 한다. (이게 안 지켜질 때 우리는 상대방을 짐승으로 칭하기도 하고...)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고자 누구든 노력을 할 것인데 상황에 내몰려 기분이 망쳐지는 순간이 오면 그날 하루는 망해버린다. 60대의 신사분도 간호사 선생님도 오늘 하루가 9시 10분에 망쳐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서로에 대한 '예의'만 있었으면 그 두 분의 하루도 온전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하루 종일 환자들과 환자 가족분들을 응대해야 하는 간호사 선생님은 그다음 환자분들을 온전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걸음이 나보다 몇 배는 느린 할머니의 보폭에 맞추어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신호등이 파란 불로 진작에 바뀌었음에도 출발하지 않고 빵빵대지도 않고 할머니와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운전자들. 그분들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건네는 나.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 서로에 대한 친절과 배려이다. 그냥 '내가 만약 상대방의 입장이라면' 이라고 한 번만 생각하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자연스레 나오게 된다. 


세상이 조금만 더 밝았으면 좋겠다. 사회가 조금만 더 맑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망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모든 행동에 '예'와 '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단편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백 년후에 우리는 없다. 지금 나와 대화하는 사람들, 오며 가며 만난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 백 년후에 우리는 모두 여기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무'로 돌아간다. 더 극명하게 말하면 반으로 툭 잘라 오십 년 후에 우리는 없을 수도 있다. 없을 가능성이 더 높겠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아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극명하게 판을 짜 놓고 생각을 해보면 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갖추어야 하고 잃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예의'를 다함에도 이자가 붙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복리로...




아직도 잘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병목구간에서 내 차선의 차 한 대 , 옆 차선의 차 한 대 이렇게 교차로 한 대씩 차가 들어갈 때 내 앞에 옆 차선의 차 두 대가 같이 들어오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나는 이때 정말 화가 나더라.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 얌체 같으니라고!' 이해해보려 하는 데 정말 화가 나고 용서가 안 되는 일이더라... 이건 뭐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하지? 그런데 이건 상대방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자를 주세요. 복리로 다가...

글. 그림 by 묘해

이전 05화 괜찮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