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기획력 관련 연수를 들으러 연수원에 갔다. 승진 예정자 대상 연수여서 필히 수강해야 하는 연수였다. 연수에 대해서 딱히 기대는 없었고 그냥 출근하지 않아도 됨에 만족을 하고 연수원에 갔다. 40명이 채 되지 않는 수강생들이 여섯 명씩 묶여 조편성이 되어있었고 나는 그중 마지막 조인 6조에 편성되었다.
강사님이 조별로 현재 진행 중인 일들이나 진행하고 싶은 일들 중 주제를 정하여 그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라고 하였다. 다른 조들은 주제를 정하려 각자의 의견을 말하기 바빴고 순식간에 강의실이 시끌벅적해졌다.
우리 조만 빼고...
우리 조는 다들 극내성향인 듯 먼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었고 나 역시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평가를 받는 자리도 아니어서 굳이 여기에서까지 힘을 빼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있었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 조원 모두가 같아 보였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강사님이 십 분 정도 더 토론을 한 후 어떤 주제를 정하였는지 그 주제를 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주제를 이어나가고 싶은지 조별로 발표를 하라고 하였다.
아뿔싸... 이 연수는 기획력 연수이다. 조편성이 되어 있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너무 느긋하게 있었다.
우리 조는 갑자기 바빠졌다. 뭐라도 얘기를 해서 뭐라도 주제를 정하여 진짜 뭐라도 발표를 해야 했다.
드디어 한 명씩 얘기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각자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 그럴싸한 얘깃거리는 없었다. 내 차례가 되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조원들에게 얘기를 하였다. 내가 생각한 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라기보다는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아쉬웠던 부분, 안타까운 부분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좀 채워지면 어떨까... 하는 평소에 늘 하던 생각을 짧게 설명하였다.
갑자기 조원들이 그러니까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이... 좋단다... 내 주제가 좋단다... 아이고야... 이 사람들이 진짜로 하는 말인지 그냥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하니 '오늘은 너야... 미안... 우리 조를 너에게 맡길게' 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데 순식간에 주제로 굳혀졌다.
1조부터 나와서 주제를 발표하라는 강사님의 얘기에 1조의 대표가 나와서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조원들이 너의 얘기를 주제로 정했으니 발표도 네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였다. 아... 말렸다. 이번 연수에서 쉬기는 다 틀렸다... 다른 조에서 발표하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벌써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한다.(나는 다들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더라.) 학창 시절에도 항상 구석이나 맨 뒷자리에 앉아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는 학생이었고 발표라던지 동아리 활동이라던지 등등 모두 싫어한다. 극내성향이다.
이런 내가 얼떨결에 주제를 발표하는 꼴이 된 것이다. 다른 조를 보니 발표를 할 듯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적는 모습들이 보였다. 발표할 내용들을 간단히라도 정리하는 듯 보였다. 나도 따라 적었다. 이대로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한다면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리고 눈동자가 사방팔방으로 흔들리고... 아...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게 분명하기에 뭐라도 적어야 했다.
'그러니까 큰 주제는... 이 주제를 정한 이유는... 그리고 또 뭐지? 앞으로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아이고 머리야...' 하는 사이에 점점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발표하는 사람들을 보니 잘하는 사람도 있고 쓴 것을 그냥 읽는 사람도 있었고 적어온 종이가 팔랑팔랑 떨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젠 모르겠다. 눈 감고 피스~ 나 외치자... 하는데 6조 나오란다. 때가 왔다.
단상으로 걸어 나가는 데 동기들이 웃는다. 발표를 할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발표자로 내가 나가니 다들 웃는다. 아주 작은 소리로 '파이팅'도 한다. 살의를 느낀다.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쥐고 앞을 쳐다보니 수십 개의 눈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를 주목하고 있다. 강사님은 교실 맨 뒤에 서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아... 이런 집중! 정말이지 싫다... 시르다...
한 손에는 마이크 그리고 한 손에는 종이 한 장...
종이를 슬그머니 교탁에 놓았다. 좀 전 발표자의 팔랑팔랑 떨리는 종이가 생각나서 내 종이도 팔랑팔랑 나풀나풀 눈치 없이 떨릴까 봐 종이를 버렸다. 그냥 조원들에게 내 생각을 말한 것처럼 천천히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 발표대회는 아니잖아... 발표를 잘하려 애쓰지 말고 말하려는 내용과 전하려는 의도에 집중하자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였다.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말을 시작하는데... 왜 그랬을까?
"발표를 하기 전에 먼저 제 MBTI가... 제 성향이... "
이 말에 다들 웃기 시작했다.
'왜지? 왜 웃지? 어느 포인트가 웃기지? 아직 내 MBTI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뭐지?'
"암튼 극내성적인 데다... 이런 발표, 앞에 나서기는 절대... 흠흠... 이런 제가 발표라니 아이고야... 종이에는 뭐라도 끄적대기는 했는데 눈치 없이 팔랑거릴라 그냥 버렸습니다... 그럼 저는 제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느낀 점과 아쉬운 점 그리고 바라는 점을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어깨를 한 번 툭 떨어뜨린 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때였다. 요동치던 심장은 순식간에 잠잠해졌고 툭 떨어뜨린 어깨 덕분에 자세가 편안해지며 성대가 조이지도 않았고 그 덕에 목소리도 아주 편하게 자연스레 나왔다. 이렇게 되니 발표를 하면서 자연스레 옆으로 두 걸음 다른 쪽 옆으로 두 걸음 앞으로도 한 걸음... 이렇게 몸이 움직여지며 단상을 왔다 갔다 하게도 되었다.(택견 아님)
발표가 끝나고 나니 이상하게도 다들 눈이 반짝였다. 강사님이 잘했다 칭찬도 하신다. 무대체질인데 여태 모르고 살았냐 하신다. 뭐지? 심장 박동수가 여전히 정상적이다.
뜻하지도 않은 결과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금 골격이 강해졌나 생각해본다. 잘하리라는 기대와 잘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얘기를 한 탓이었을까? 항상 단상에 올라 강의를 하고 연설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할까? 처음부터 잘한 걸까. 하다 보니 익숙해진 걸까? 꼭 맞춰진 시나리오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그냥 편하게 한 게 답이었나?
남들에게는 별일 아닌 일이 나에게는 별일이었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얘기처럼 이유 찾기 생각은 계속되었는데.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였다. 긴장하지 않는 것. 긴장하지 않는 것이 긴장하지 말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긴장하게 되긴 하지만. 긴장하지 않고 어깨에 힘을 뺀 것이 답이었다.
긴장하면 망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어깨 뽕 넣은 것 마냥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된다. 그럼 자연스레 목소리도 떨리고 떨리는 내 목소리를 느끼면 입술도 떨리고 손도 달달 떨린다. 급기야 숨 쉴 틈을 찾지 못해 빠르게 이어진 말은 결국 급한 숨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전체에 울려 퍼진다. '하~~~' 하고...
멍하게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다가 맑은 하늘 날아가는 새 한 마리에 생각이 나 글을 써 내려간 적도 있고 어떤 주제의 글을 쓰겠다는 거창한 포부로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써 내려간 글도 있다. 글을 읽어주는 이들의 느낌은 별개로 하더라도 글을 써 내려갈 때 어떤 글은 막힘없이 그냥 써내려 지고 어떤 글은 한 단어 한 단어가 턱처럼 턱턱 걸리기도 한다.
잘해야 한다. 잘하고 말겠다. 큰 울림을 주고야 말겠다. 생각을 하고 써 내려간 글들이 며칠 뒤 다시 읽어보았을 때 그냥 '펑'했던 적이 있고 힘을 빼고 그냥 하고 싶은 얘기들을 주저리 늘어놓은 글이 오히려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힘을 빼는 것,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레 행하는 것, 일이든 발표든 글이든 사랑이든 무언가를 행하기 전에 첫 번째로 가져야 할 부분은 거대한 이상이 아니라 힘을 빼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은 어떤 결과물이 완성되었을 때 여느 결과물과는 다른 한 끗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힘을 빼고 긴장하지 않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지만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일이든 발표든 글이든 사랑이든 바라보면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힘을 뺄 수 있다. 우리 인생이 각박하고 긴장의 연속이어서 한 순간도 집중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만 조금은 무심한 듯 멀리서 바라보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생각보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순간도 집중을 놓아선 안 되는 것은 운전뿐인 듯하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라 심혈을 기울여 한 화장은 항상 눈썹이 앵그리버드가 되고 애써서 만진 머리는 X 손임을 널리 알리듯이 삼각김밥이 되어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