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을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부동산 중개인 때문에 그냥 집을 사기로 했다. 시드머니가 어느 정도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거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고 최소와 최상의 컨디션에서 적당한 타협을 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2-3년 전부터 이미 선호하는 주거 환경이 확립되어 있던 터라 매매 지역을 확정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실 매매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지 확신할 순 없다. 작게나마 매매비용 외 기타 세금 및 이사비용을 더 모아야 하고 매매가에 대한 추이도 조금 더 살펴볼 예정이지만, 이제는 독립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한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다. 서대문구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기 전에 마포구로 이사를 왔다. 거주에 대한 모든 기억은 '우리 동네'로 한정됐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 나오면 버스 정류장이 있고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스타벅스에 가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산책도 할 겸 슬렁슬렁 걸어 나가면 그만인 그런 곳.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혈육은 소위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일상의 불편함을 호소하지만 나는 달랐다.
본가 앞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보다는 근처 나무 그득한 공원이 좋았고 북적거리는 핫플레이스보다는 나만 아는 동네 산책길이 좋았다. 편리와 선호 중 후자를 선택했다. 출퇴근 길이 10분 정도 길어질 테고 도보로 갈 수 있는 스타벅스는 없겠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높은 빌딩이 없고 집 앞이 6차선 도로까지는 아닌 현재 거주지에 비하면 소박한 곳으로 떠날 것이다, 조만간.
보증보험 가입이 되니까 안전하죠,
이 집 컨디션이 좋아서 빨리 결정하셔야 해요.
진저리가 났다. 어느 집을 가도 어느 중개인을 만나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원룸에 보증보험이 가능한 매물이 거의 없으니 그렇게까지 깐깐하게 따지지 말고 어서 계약하라는 그 태도가 너무 우스웠다. 보증보험 가입이 안 되는 그 집이 이상한 것이지 내가 문제가 아닌데 어떻게 저런 뻔뻔한 눈으로 계약을 유도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 본가와 직장이 멀지 않아 거주가 해결되지만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첫 번째로 흡족했던 집은 연희동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170cm에 가까운 내가 허리를 펴고 서도 천장이 정수리에 닿지 않을 정도의 층고와 전세입자가 재계약을 하고 아주 깨끗하고 예쁘게 살고 있는 곳이었다. 어느 정도 사용감이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그 부분이 나의 불안을 덮어주었다. 등기부등본에서 가압류 흔적을 보기 전 까지는.
부동산에서 받은 등기부등본에는 없던 말소사항 중 하나였다. 아무리 10년 전이라고 해도 가압류라니. 100년 전 기록이라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어쨌든 몇 천의 돈을 쓰는 일인데, 내 돈을 쓰면서 그런 불안까지 사고 싶지 않았다. 중개인에게 묻고 싶다. 그 돈이 네 돈이어도 대출이 나오면 안전한 매물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보증보험까지는 안 들어도 된다던 그 말에 변함이 없냐고.
두 번째 괜찮은 집은 연남동 원룸이었다. 6평이라고 했지만 7평은 될 것 같은 크기에 네이버 부동산에 올라온 매물 사진과 동일 컨디션을 가진 집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동향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북동향이었던 점과 전세입자가 흰색 물벽지를 발랐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제는 중개인의 태도였다. 연희동 복층 오피스텔의 가압류 기록을 알게 된 순간부터 부동산 관련 지식이 머릿속에 갑자기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는데 중개인이 그런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건축물대장에는 근린생활시설로 되어 있는데 버팀목 대출이 나오나요?"
"보증보험 한도 금액이 있나요?"
"등기부등본을 볼 수 있나요?"
"관리비가 x0,000원이던데 어떤 항목이 포함인가요? 고정 비용인가요?"
금액대를 이야기하고 매물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보고자 하는 매물을 찍고 보러 온 것인데 그렇다면 중개인은 최소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나를 만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관리비 관련 질문에도, 건축물대장 관련 질문에도 모두 휴대폰을 꺼내 읽고는 답변했다. 그럼 내가 물어본 의미가 있나? 적어도 당황한 눈빛을 들키진 말았어야지.
독립 대신 집주인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래의 말이었다.
집 많이 보셨으면 이 집 컨디션 좋은 거 바로 아실 텐데.
원룸 중에 보증보험 되는 매물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나는 '저도 집 많이 보고 싶은데 아무 집이나 볼 순 없잖아요, 저한테도 기준이 있으니까요.'라고 답변했고 그는 웃었다. 지랄, 웃음이 나니? 내가 아는 걸 모르는 사람 혹은 사정이 급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집을 보여주고 중개수수료 받으면 끝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모든 것에 환멸이 났다.
연남동 골목을 걸어 나오며 현관문 한 번 열어준 놈에게 몇 십만 원의 중개수수료를 내느니, 차라리 그냥 집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몇 달 더 돈을 모으고 지속적으로 매매가의 고락을 살펴야겠지만 내 주거의 주도권을 집주인의 현금 유동성에 맡길 순 없는 일이다.
여하튼 뭐, 그렇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