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냥 집을 살게.
나는 내가 책임진다.
바리바리 모은 돈으로 집을 사겠다던 시절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살겠다는 신념에서 비롯한 다짐이었는데 참 무모했다. 지금은 내 힘으로 집을 사겠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나의 돈뿐 아니라 신용, 그리고 평생 빚을 성실하게 갚겠다는 결의가 포함된다.
이걸 알게 된 지금 나는 어른일까? 어른이 될 마음을 먹은 걸까?
[참고] 본인은 어제 마트에서 후숙 된 아보카도를 잘 골랐다는 이유로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 으스댔다.
집에 대한 '집착'은 '이러다 객사하겠는데?'라는 걱정에서 시작됐다. 이러한 우려를 내뱉으면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어넘긴다. 물론, 어느 정도 기우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가 나의 주거를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진다. 없다. 그게 나의 결론이다.
세상천지 혼자는 아니다. 허나, 부모는 그들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혈육 또한 그러하며 그들에게 나의 주거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 따위는 없다. 따지고 들자면 의무는 나에게 있달까? 육신을 빌려 이런저런 일은 다 하고 살고 있으니까.
아무튼, 위와 같은 이유로 몇 년 전 금융기관의 모든 계좌 잔액을 합산해 봤다. 결국 왜 이렇게 살고 있냐, 자문자답 하며 자괴감에 푹 절여진 채로 내 집마련 잠정적 포기자가 되었다. 적금이고 예금이고 주식이고 다 덮어버렸다. 적금과 예금은 관성적으로 유지했고 소액 주식은 팔아서 정리해 버렸다. 자본주의 환멸이었다.
Q. 왜 다시 자본주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데?
A. 차라리 그냥 집을 살게. (*글 참조)
'잠정적'이라는 표현을 썼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국 몇 년 후 세입자가 되기보다는 집주인이 되는 편이 한결 낫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도 모르지 않았다. 자본주의에 굴복한 내 집마련 잠정적 포기자, 그게 나다.
현실직시 후, 점찍어뒀던 지역 아파트 매매가를 찾아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누군가의 말처럼 집값이 하향 안정화 되어 있었다. 마법이 아닐 리 없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름) 두 눈에 불을 켰다. 시중에 나온 매물 중 하나를 정해서 곧 구매라도 할 기세로 대출가능 금액과 월 상환금액을 산출했다. 이 과정에서 사려고 하는 매물 평수를 늘렸고 현재 기준, 월평균 근로소득이 월 상환금액을 품을 수 있는지 계산기를 두드렸다.
기꺼이 그 집을 살만 했는가?
No, 간당간당. 쾌히 죽을 법했지만 자발적으로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대로 객사할래?!
인생을 포기 혹은 비포기로 분류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게 정리됐다. 다시 말해, 비포기 집단만 끌어안고 가면 될 일이다. 해서 적금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출과 이자를 상환하는 사이클이 원활해질 때까지만 말이다. 애초에 돈을 모으는 목적은 집을 사기 위함이었다. 근원적 목표를 달성했으니(아직 아니지만) 1년 정도는 '돈 모으기'를 잠정중단 하고 자금흐름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고정비용 기준으로 삶이 다져지고 나면 작고 소중한 근로소득에 맞춰 새로운 금융 루틴이 자리매김하겠지, 뭐. 그동안 근로소득도 '소폭' 상승하지 않겠는가, 권고사직 당하진 않을 테니 라는 배짱도 부려가면서 말이다.
최소한의 돈 그리고 평생 은행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 지속적인 소득 상승에 대한 무한한 믿음만 있으면 내 명의로 된 부동산 서류 하나쯤은 껌이다. 적어도 부지불식간에 길에서 죽진 않을 테니까!
더불어, 정말 올해 집주인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된다면 배짱 농도 짙은 내적자산(추정비율 10:8)에 공을 돌리겠다고 선포한다. 탕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