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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08. 2021

미국 몬태나 어린이집 적응기

“엄마! 가지 마! 가지 마! 싫어. 싫어.”

2017.3.-2020.8. 3년 반의 몬태나 생활 이야기

Life is either a daring adventure or nothing. -Helen Keller-  

      


몬태나에서 처음 겪는 3월과 4월은 참 추웠다. ‘3월부터는 봄 아닌가?’라는 생각은 우리나라에서 통하는 생각이었다. 도착해서부터 몇 달 간은 눈이 많이 오는 날이 많아 늘 두꺼운 잠바와 부츠, 장갑은 필수였다. 캠퍼스 주택에는 실내 주차장이 따로 없었기에 아침에 눈을 뜨면 으레 눈이 왔는지 먼저 확인을 하고 눈을 치워 놓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집은 교직원 주택의 여러 유형의 집 중에서 가장 작은 집. 대략 15평 정도의 아담한 집이었다. 캠퍼스 커뮤니티 관리를 해 주시는 분께 물어보니 지어진 지 최소 50년 이상 된 집으로 교직원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반세기가 지난 집이라니! 다행히 우리집은 교직원 주택 중에서도 캠퍼스 학교 건물과 가까워 남편은 차가 없이도 걸어서 20분 정도 걸려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이사 후 알게 된 사실은 많은 학생 및 교직원들이 캠퍼스 주택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보즈만의 집값이 인구 4~5만 정도 되는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에 비해 약 2배 이상 비싼 탓이었다. 교직원 주택의 집값은 캠퍼스 바깥에 있는 같은 규모의 보즈만 집값 대비 50~70% 정도였기에 매우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는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딱 하나 빈집이 나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작은 집이라도 배정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했다.


이사 후, 남편은 포닥 생활에 적응하느라 무척 바빴다.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연구원이기에 2년 간의 계약기간 동안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는 자리였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썰렁한 집에서 아들과 함께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구가 없는 집이어서 더 썰렁했을까? 몬태나로 떠나기 전, 고고씽!을 외치며 "인생 한 번뿐인데 몬태나에서도 살아봅시다."라고 큰소리쳤는데, 막상 이사를 오고 나서 며칠간은 이상하리 만큼 마음이 공허했다. 반면, 아들은 나와는 달리 자못 신나는 눈치였다. 하루 종일 나를 부르며, "엄마 이거 해요, 엄마 저거 해요" 물어보기 바빴다.


생각해 보니 아들을 낳고 나서 4년 동안 한 번도 단 둘이 충분하게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었다. 아들을 낳은 후 출산휴가 동안은 늘 친정에서 친정엄마와 함께 있었고, 학교로 바로 복귀한 후부터 어린 아들은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 아니 6~7시까지 맡겨졌었다. 예전에 다녔던 어린이집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었던 직장어린이집이었다.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을 했는데, 나는 칼퇴근을 거의 못했기 때문에 7시가 다 되어서 아들을 찾기 일쑤였다.


몬태나의 작은 집에서 아들과 단 둘이 함께 보내는 이 시간, 한국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갖지 못했던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시나브로 깨닫기 시작했다. 종이접기, 그림 그리기, 만화 캐릭터 흉내내기, 신문지 찢기, 밀가루 반죽하기, 쌀 콩 세어보기, 냄비 두드리기 등등. 소소한 재미를 찾는 하루는 생각보다 바쁘고 보람차게 지나갔다.


4살에 불과했지만 재잘재잘 우리말을 참 잘했던 아들. 엄마 아빠 앞에서는 참 수다쟁이였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척 긴장하고 말문을 닫았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 영어에 대한 부담감은 비단 나만 겪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 오면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을 것 같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3월의 어느 날, 새로 알게 된 친구가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 가보자며 차를 태워 주었다. 날씨는 참 화창했고 햇살이 좋았다. 갈 때만 해도 아들은 기분이 좋았는지 신나게 들뜬 표정이었다. 하지만 파머스 마켓에 도착을 하고 나니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몬태나 사람들은 큰 개를 많이 키우고 또 어디에서나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마켓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큰 개들이 몇 마리가 왔다 갔다 하니 아들은 순간 기겁을 했다. 그리곤 두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계속 안아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30분 이상 계속 안고 업고 돌아다니자 나는 금방 녹초가 되었다. 결국 우리들은 아이스크림만 먹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랜 시간 느긋하게 저녁까지 먹고 오려던 계획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사 후 두 달쯤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메일로 도착을 했다. 캠퍼스에 위치한 어린이집에 드디어 빈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친구도 없이 하루 종일 집에서 나와 붙어만 있을 순 없었기에 하루 중 몇 시간만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어 신청을 했는데 대기자가 많아서 한참 기다린 결과 빈자리가 났다. 아들을 설득하고 설득하고, 엄마와 같이 가서 계속 같이 있는다는 조건으로 어린이집에 첫 등원을 했다. 내 무릎에 착 앉아서만 있는 아들과 2시간여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왔다 다음 날 다시 어린이집에 가기를 반복했다.


그런 나날들이 며칠쯤 지나고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제안을 했다. 엄마와 조금씩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어린이집에서 엄마와 헤어질 땐 잠시 후 다시 만날 것을 한번 더 상기시켜 주고, 꼭 안아주고,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과정을 통해 헤어지는 연습을 하자고 하셨다.


헤어짐을 연습하기로 한 첫날 아침은 전쟁과도 같았다. 아들은 늦장을 부리며 떼를 쓰고 짜증을 부렸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부터는 온몸으로 저항하며 엉엉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지 처음 알았다.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 지 어린이집 바깥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와서 쳐다보고 갈 정도였다. 내가 집에 가려고 나가는 문쪽으로 향하자 아들은 더 크게 소리치며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엄마! 가지 마! 가지 마! 싫어. 싫어.” 금세 쉰 목소리를 내며 벌게진 눈을 부릅뜨고 나를 향해 이 말을 무한 반복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와 창문 너머 눈물 콧물 흘리며 아우성을 치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집으로 향했다. 어린이집에서 집까지는 겨우 5분 거리. 마음이 무거워 눈길 사이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나도 모르게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 새로운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인생의 모험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힘든 도전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침마다 반복하는 힘든 헤어짐의 연습.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한국에서 온 4살 아이와 함께 하는 눈물과 고함 속의 헤어짐이 힘들 법도 했지만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이셨던 샐리 선생님은 늘 미소를 지으며 의연하고 담담하게 아들을 달래고 창문 밖으로 집에 가는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도록 했다. 샐리 선생님은 머리가 새하얗고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선생님. 경험 많고 노련한 베테랑 샐리 선생님을 만난 것은 우리 가족에게 큰 행운이었다.


미국 어린이집도 대부분의 선생님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한국과 비슷했지만 선생님들의 나이대와 그 수에서 차이가 있었다. 60이 넘으신 선생님부터 20대 선생님까지 다양한 선생님들이 계셨고, 자원봉사자로 아이 돌봄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다. 그리고 행정 디렉터라고 불리는 원장 선생님이 아주 젊은 분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장, 원장 등의 직을 맡고 있는 분들의 나이가 교사들보다 많은 경우가 대부분.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한 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이 곳의 어린이집은 젊은 여선생님 일색이었던 예전의 한국 어린이집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바깥놀이가 어린이집의 일과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어린이집에 도착하자마자 바깥 놀이터로 나가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선생님들은 그저 아이들 곁을 서성거리며 가끔 분쟁이 일어나면 중재만 할 뿐,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제각기 제멋대로 놀 수 있도록 자유로운 시간을 많이 주었다.


작고 오래된 몬태나 우리집, 낯선 환경과 새로운 언어. 많은 것들이 예상과 기대보다는 좀 더 불편했고 좀 더 힘들었지만 몬태나의 여름이 다가올수록 우리 가족은 차츰 외국생활에 적응을 해 나갔다. 어린이집에 다닌 지 몇 주의 시간이 흐르자 아들도 더 이상 아침에 헤어질 때 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다녀온 후에는 친구들과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곳, 몬태나 보즈만에서 시작한 삶. 낯설고 어색한 해외살이의 첫 발걸음은 쉽지 않았다. 나도 아들도 적응이 쉽지 않아 늘 마음이 편치 않았던 한 두 달의 시간이 지나갈 무렵에야 보즈만의 따뜻한 햇살과 드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도 사고 가구도 조금씩 갖추자 몬태나의 작은 보금자리는 어느덧 우리 가족의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365일 중에서 평균 약 300일 정도 햇볕 좋은 날씨를 자랑하는 이 곳 보즈만(미국은 평균 약 200일). 물론 6~7월에 눈이 오기도 하지만 포슬포슬 건조한 눈이라 햇살 좋은 낮이 되면 금방 녹아버렸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니 몬태나의 상쾌한 공기, 따뜻한 햇살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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