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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May 10. 2021

도쿄 전철 안의 책읽는 그녀

내가 사랑한 것들 16

16. 도쿄 전철 안의 책읽는 그녀


가끔 이 사진을 보고 혼자 웃는다. 다른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촌철살인이 아니라 촌화살인이다. 


그녀는 책 페이지 보다 더 많아 보이는 포스트잇으로 촘촘히 도배된 책 삼매경에 빠져 있다. 좌우의 젊은 총각과 아주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인류의 모습에 대한 우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수년전 도쿄 지하철 안에서 이 풍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들에게 허락을 받지 못해서 실례이긴 했지만...



처음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내 사랑은 계속 자라났다. 멋대로 그녀의 인생에 대해 상상해본다. 무엇을 하는 분일까? 왜 저토록 열심히 책을 읽으시는 걸까? 책은 일본 어느 지역의 현대사인 것 같다. 은퇴한 교수 아니면 연구자, 향토 사학자? 혹시 내가 모르는 일본의 대학자일 수도 있다. 단아한 표정과 확고한 입매에서 숨길 수 없는 카리스마가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연세로 짐작해봤을 때 현업에 계신 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연구를 놓을 수는 없다. 인생은 완성이 아니라 배워가는 과정이다. 내일 죽더라도 나는 연구자로 죽을 것이다. 일일이 포스트잇으로 표시하고 논문을 준비한다. 종일 도서관에 앉아 있다 저녁이 되어 외곽 지역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전철 안에서도 쉴 수 없다. 집에 도착하면 간단히 두부 한 모로 저녁을 때우고 집필을 시작할 것이다.  


아니면 은퇴를 한 뒤 그녀는 평생 한이었던 공부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남편은 먼저 갔고 두 아들 모두 독립했다. 그 동안의 내 인생은 뭐였을까? 내가 남기고 갈 것은 무엇일까? 인생을 좀먹는 허무한 생각에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전쟁도, 버블경제의 추락도 그녀를 꺾지 못했다. 먹고 살기 위해 접어두었던 공부를 이제부터라도 시작해보자. 무엇을 공부해볼까? 그녀는 도쿄에서 먼 시골 바닷가 마을에서 자랐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지역의 조상 도래인들의 이야기가 줄곧 가슴에 남았었다. 해초를 따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저 먼 바다를 보며 수평선 너머로 배를 타고 왔던 조상들을 상상해보기도 했었다. 어릴 적 내가 나고 자랐던 고향에 대해 연구를 해본다면 보람이 있을 것이다. 나 말고 누가 또 고향의 역사를 연구해 남길 수 있을까? 그렇게 그녀의 연구는 시작되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본 뒤 대학을 마치고 지금 박사과정에 있다. 내년이면 논문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다시 공부를 시작한 후 십년이 넘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학원에 가려고 면담을 했을 때, 지도 교수가 물었었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신 이유가 뭔가요? 그녀는 가볍게 웃고 말았다. 자기보다 한참 젊은 중년의 교수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학 동기였던 천 모 교수가 연전에 썼던 칼럼 하나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중년의 지금, 인생의 계단을 계속 올라가려고 마음의 불을 지펴나가야 할지 아니면 서서히 내려갈 준비를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던 친구의 글을 읽고 나도 격하게 공감을 했었다. 앞서 간 선배들은 대부분 후자 쪽 생각의 줄에 서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현자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찜찜했지만 딱히 그 견해에 반대할 만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단테처럼 나도 인생의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말이 아니라 '전철 안의 독서'라는 단 하나의 행위로 웅변하고 있다. 나는 아직 현자인 척하며 초탈한 자세로 인생을 관조하지 않겠다. 나는 아직 내 인생을 걸고 세상과 맞설 것이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니쉬 라인까지 나는 결연히 달려갈 것이다. 그녀의 꼭다문 입술에서 보이는 기개와 결의에 나는 경이와 찬사를 보낸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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