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에 의한 가속화
마이클 샌댈(Miachael sandel)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과 강의로 유명한 정치 철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다. 그는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강의로 널리 알려진 바 있다(한국책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 그는 첫 번째 강의에서부터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lema)를 주제로 꺼내며 도덕(Moral)에 접근한다. 두 번째 강의에서는 그는 리처드 파커 이야기를 꺼낸다. 함선이 좌초되어 구명 배로 옮겨 탄 4명 중 1명이 리처드 파커였다. 다른 3명이 바닷물을 마음대로 마시고 난 후 죽어가고 있는 리처드 파커를 찔러 죽여 피를 마시고 살점을 먹기 위한 시도를 한다. 결과적으로 리처드 파커는 죽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그를 죽일지에 대한 추첨 동의를 구하게 된다. 마이클 샌댈은 이 추첨에 대한 '동의' 유무가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강의가 흘러가는 포인트와 달리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악의 씨앗이라는 주제로 말이다.
작은 배 안에서 악의 시작은 바로 리처드 파커를 죽이냐 마냐 고민한 순간이라기보단, '추첨(lottery)'이란 아이디어가 등장한 순간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추첨 아이디어를 낸 자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의 측면에서 위기의 순간에 나를 살리고자 한다.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의 안녕 따위는 안중에 없기가 쉽다.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추첨'이라는 아이디어인즉슨, '내 의지로 죽이는 것 같지 않지만 죽이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즉 '추첨'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본인 스스로 살인하였다는, 또는 살인을 주도하였다는 심적 부담감과 책임감을 피해버리겠다는 의미다. 또한 이는 다른 사람들의 동조를 이끌어내기 쉽다는 점(문턱을 낮춘다)에서 더욱 악랄한 것이다. 동조가 시작되면 악의 씨앗은 발아한다.
만약 추첨이 실패했어도 약해진 리처드 파커를 죽이는 방법은 그 자에 의해 또 등장했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낸 자는 그저 죄책감을 지울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는 본인의 목적 실행을 돕게 만들기 위한 틀을 짠 것이다. 누가 아이디어를 냈고 누가 동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묘한 악의 길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우리는 살면서 약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적 힘이 있어 쳐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힘이나 운이 없어 휘말려들거나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나에게 피해를 가한 사람만큼이나 미운 사람이 있다. 그건 바로 방조자다. 방조했거나 가해자를 옹호하며 피해자인 나에게 사후 이해를 종용한 사람이다. 물론 일은 이미 벌어졌기에 현실적으로 수습하려 한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악에 대한 분노의 씨앗만은 보여줬어야 한다. 대항할 수 없다면 분노라도 하란 말도 있잖은가.
따라서 악은 악함을 행하는 자가 씨앗을 심은 다음, 애매한 동조자들에 의해 무럭무럭 자라 악은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애매하게 동조하거나, 애매하게 거부해서는 악을 행하는 자의 파종을 막지 못한다. 파종은 어쩔 수 없더라도 씨앗이 싹틀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도 중생이 힘든 이유를 '매우 착하지도 않고 매우 악하지도 않다'라고 말한다. 개인석 해석으로는 책임과 고난을 피하면서 결정을 미루는 태도는 결국 애매한 동조로 이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악의 씨앗을 발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적극적인 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큰 것이 다가 아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악을 거부하는 표현만으로도 적재적소에 들어맞는 적극적 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늘 존재한다. 선을 실행하는데도 늘 실패가 따라다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런 실패는 선의 씨앗을 싸고 있는 껍질과도 같을 것이다. 깨질수록 선을 더 잘 실행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