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7)
왜 그렇게까지 이들의 강연에 연연했을까. 문득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은, 나 자신을 향한 깊은 실망과 맞닿아 있었다. 실망을 넘어 분노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내가 피스보트에 가졌던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이었다. 세계 각국,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면 내 오랜 숙원이었던 진로 고민이 단번에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만큼 절박했나 보다.
이직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몇 달을 방황하던 끝에, 아무런 준비 없이 퇴사장을 내밀었던 나였다. 백수 생활 동안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진로에 대한 고민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풀리지 않았다. 5개월이 지나도록 끝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더 깊이 빠져들었다. 지칠 대로 지쳐가던 시기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 피스보트였다.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보였던 그 기회. 하지만 막상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느꼈던 좌절감은 그만큼 컸다.
그러나 내 오만함을 인정하고 나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연자들과 사석에서 교류하며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점차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나와 비슷한 좌절을 겪고 있던 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세계적인 대기업에 다니며 승진의 기회까지 포기하고 이 배에 올랐다. 진로 고민을 해결하고자 했던 그 역시 나처럼 큰 기대를 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강연에 대한 실망감이 그와 나를 금방 가까워지게 했다. 공교롭게 그도 나도 INTJ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석에서 강연자들과의 대화는 깊이 있고 흥미로웠는데, 왜 강연에서는 그들의 전문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그들의 진정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청중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고, 우리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전략은 이랬다. 승선 예정인 강연자들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그들이 승선하면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그들의 진솔한 경험을 듣고자 했다. 그런 다음, 강연 전에 이루어지는 사전 미팅에서 강연자들이 전달하지 못했던 중요한 내용들을 피드백하고, 강연에 반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나는 사전 조사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취합하고, 동료는 이를 바탕으로 강연자들에게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물론 모든 강연자가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리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강연자들의 깊은 지식과 경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건 그들에게도, 청중들에게도 큰 손실이라는 생각에 강연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피드백을 반영한 강연들은 청중들로부터 더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강연자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며 각자의 전문성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지식의 양과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역사적, 사회적 배경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나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피스보트에서의 배움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내가 기대했던 빠른 해결책은 없었지만, 그 대신 진정한 배움의 즐거움은 천천히, 그리고 더 깊이 나를 찾아왔다. 이 배움은 내가 스스로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피스보트는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을 뿐, 진짜 답은 그곳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들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