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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퍼즐도사 Oct 09. 2024

도망치거나 직면하거나

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6)


세계 일주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우리는 자메이카를 지나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배움의 기회가 실망으로 돌아올 때쯤이었다.



이제 곧 마이애미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마이애미는 한국까지 직항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에 하선을 하려거든 뉴욕에 도착할 때 해야겠다는 계획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하선을 결심한 이유는 바로 강연자들 때문. 처음 피스보트에 합류할 때, 나는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과의 강연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실제 강연 내용은 내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불만으로 하선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친한 동료들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동료들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내가 피스보트에 합류한 가장 큰 이유가 강연자들일 줄은 몰랐다며 크게 놀란다. 자기들은 세계 일주하는 것, 혹은 일상을 벗어나는 것에 목표가 있었던지라 강연의 퀄리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나도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그동안 많은 동료들이 사전 미팅 때부터 난장판이었던 강연에 대해 별말 없이 지나갔는지. 좋은 강연을 위해 강연자들과 씨름했던 나를 유난스럽게 생각했는지 말이다. 그저 나와 동료들이 기대한 바가 달랐던 것이다. 그들은 여행 자체, 새로운 경험을 우선시했지만, 나는 이 배에서 ‘배움’을 기대했던 것이다. 성장하지 못하는 환경이라고 생각하면 고연봉도 마다하고 회사도 때려치우는 마당에, 내가 왜 여기서 배움도 없이 이런 고생을 해야 하지?




마지막 기항지가 될 뻔했던 뉴욕에서



동료들에게서 느꼈던 거리감은 20대 초반의 한 승객과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두드러졌다. 하루는 승객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한 강연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강연자는 내 하선 결정을 굳히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한 강연의 주제는 ‘인플루언서의 디지털 노마드 삶’이었다.

디지털 노마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이렇게 콕 집어 말할 만큼 그의 강연은 실망스러웠다. 팔로워 수가 천여 명인 그는 ‘디지털 노마드가 되는 법’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그저 ‘이런 삶은 아주 좋아요!’와 ‘저는 돈을 많이 벌어요!’ 같은 환상적 내용만 내세웠다. 내 눈에는 속물적인 사람으로 밖에 안 보였다. 처음에는 이런 속물적인 강연자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승객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저런 사람을 존경하다니?’ 그 승객뿐 아니라 많은 젊은 승객들이 이 강연자를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보며 나는 한동안 그들을 속물로 여기기도 했다.




생각의 전환

하지만 곧 나는 그 생각이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승객들은 대부분 피스보트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해외를 경험해 보는 대학생들이었고, 그들의 눈에 이 강연자는 아주 배울 점이 많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반면 나는 어려서부터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하며 다양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배워왔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았고, 혼자 여행하는 것이 익숙했다. 그래서 세상과의 자유로운 교류가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나의 일종의 '특권'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특권을 누렸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자격은 없었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큰 영감과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것인데, 내가 뭐라고 그들을 속물이라고 평가하지?



이후로 나는 강연자들에 대해 좀 더 열린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업무 외엔 일절 교류하지 않았던 그들을 강연자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맙소사. 그들과 사적으로 대화하다 보니 내가 그토록 갈구했던 그 ‘전문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연을 업으로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자신들이 현생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 그 인플루언서는 안타깝게도 첫인상 그대로였긴 하다.) 만약 내가 끝까지 내 편견을 고수하고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면, 이 귀중한 배움의 기회를 영영 놓쳤을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생각의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만 넓히면,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결국, 배움은 바로 이 시선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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